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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태조 3)년 태묘, 경복궁 낙성(落成) 1422년(세종 4년) 한성(漢城) 낙성(落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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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등록일
2013-11-23 11:08:06
조회수
7703
1395(태조 3)년 태묘, 경복궁 낙성(落成) 1422년(세종 4년) 한성(漢城) 낙성(落成)



1395년 6월 6일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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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8월 11일 고려국 도읍인 송도(松都:개성)의 태조(1393년 2월 15일 조선국 건국한 이단(李旦) :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장군의 휘이다)가 무악(毋岳)에 이르러서 조선국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는데, 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 부정 유한우(劉旱雨) 등이 태조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 무악(毋岳)은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이에 태조가 말하였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윤신달 등이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였는데, 태조가 유한우를 불러서 물었다. “이 무악(毋岳)이 끝내 좋지 못하냐?” 유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의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태조가 또 말하였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유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태조가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유한우가 대답하였다. “이 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태조가 말하였다. “옛 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유한우가 대답하였다. “고려 태조가 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개성인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태조가 말하였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고례, 백제, 신라인 3한국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하였다. 태조가 좌시중 조준(趙浚)·우시중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렀다. “서운관이 고려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 무악(毋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유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 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이에 겸판서운관사 최융(崔融)과 윤신달·유한우 등이 상서하였다. “우리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 이 날 저녁에 태조가 무악 밑에서 유숙하는 차(次)하였다.



8월 12일 태조가 여러 재상들의 제시한 의논이 대개 천도(遷都)를 옳지 않다고 한 까닭에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였다. “내가 송도로 돌아가 소격전(昭格殿)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이에 남경으로 행차하였다. 8월 13일 태조가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북쪽인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태조가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 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 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태조가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자초가 대답하였다.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태조가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 곳이 좋습니다.” 하윤이 홀로 말하였다.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 태조가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전 전서 양원식(楊元植)이 나와서 말하였다. “신이 가지고 있던 비결은 앞서 이미 명령을 받아서 올렸거니와, 적성(積城)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근사합니다.” 이에 태조가 말하였다.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 양원식이 대답하였다. “임진강에서 장단 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태조가 그만 연(輦)을 타고 태묘 지을 터를 보고서 노원역(盧原驛) 들판에 이르러 유숙하는 차(次)하였다.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태조에게 상신(上申)하였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夏)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商)나라는 박(亳)에, 주(周)나라는 풍호(豊鎬)에, 한(漢)나라는 함양(咸陽)에,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고려국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 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태조가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9월 9일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판3사사 정도전·청성백 심덕부·참찬 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태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고려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 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태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9월 23일 판3사사 정도전 등은 한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 궁궐과 기타 도시의 경영을 관리하였다. 10월 25일 태조가 한양으로 이어하였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10월 28일 태조가 새 도읍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11월 3일 도평의사사에서 장신(狀申)하였다. “태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統)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였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태묘를 세우지 못하고 궁궐을 짓지 못했으며 성곽도 쌓지 못하였으니, 이 것은 도읍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무겁게 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으나, 이 세 가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담당한 관청에 명령하여 공사를 독촉하여서 태묘와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아서 효성과 공경을 조종에게 바치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존엄성을 보이며, 또 국가의 세력을 길이 굳건하도록 해야 한 나라의 규모가 짜여지고 만세에 길이 전할 계책이 서게 될 것입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행하시도록 하소서.”태조가 그대로 따랐다.



12월 3일 태조가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 판3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臣) 태조의 휘인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臣) 이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1393년 2월 15일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 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臣) 이단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태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이어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태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 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니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臣)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臣) 이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이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 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 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고려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 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 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 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神)도 또한 영원히 제사밥인 향식(享食)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1395년 6월 6일 한성(漢城)을 토성으로 축조하기 시작하자마자 태조가 고려시대 지명인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1395년 9월 태조가 태묘와 경복궁을 낙성(落成)하였다.1399년 3월 7일 정종이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환도(還都)하였다. 1400년 12월 22일 한성(漢城)에 환도하기를 의논하는데,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창녕백(昌寧伯) 성석린(成石璘) 이하 문신(文臣) 10여 인에게 이르기를, “불행히 수창궁에 화재가 있었으니, 경 등은 서운관(書雲觀)의 비밀 도적(祕密 圖籍)을 상고하여 천도(遷都)의 이해를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하니, 이 때에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정해지지 못하였는데, 우정승 하윤(河崙)이 건의하기를, “마땅히 무악(毋岳)에 도읍하여야 합니다.”하였다. 정종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참위(讖緯) 술수(術數)의 말이 이러쿵저러쿵 그치지 않아 인심을 현혹(眩惑)하게 하니, 어떻게 처리할까?”하니, 여러 재상이 모두 말하기를, “따를 수 없습니다.”하였으나, 대사헌(大司憲) 김약채(金若采)는 홀로 그대로 따라야 된다고 하였다. 정종이 말하기를, “신도(新都) 한성(漢城)은 부왕 태조께서 창건하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따로 도읍을 세워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하였다.



1404년 1월 9일 태종이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기곡(祈穀) 원단제(圓壇祭)를 한성(漢城)인 한경(漢京)에서 행하였으니 해마다 행하는 일이었다. 9월 1일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로 한경(漢京)의 이궁 조성도감 제조(離宮 造成都監 提調)를 삼았다. 태상왕(太上王)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을 불러 태종에게 전지(傳旨)하였다. “천도(遷都)하는 번거로움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그러나 송도(松都)는 왕씨(王氏)의 구도(舊都)이니, 그대로 거주(居住)할 수는 없다.” 태종이 의정부에 하지(下旨)하기를, “한성(漢城)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고, 사직과 태묘가 있으니, 오래 비워 두고 거주하지 않으면,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닐까 한다. 명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옮겨 거주할 터이니, 응당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해야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9월 9일 한경(漢京)에 이궁(離宮)을 지을 자리를 상지(相地)하도록 명하고, 유한우(劉旱雨)·윤신달(尹莘達)·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상지(相地)하였다.



1405년 10월 11일 태종의 거가(車駕)가 한성(漢城)인 한경(漢京)에 이르러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고, 이궁(離宮)이 아직 완성되기 않아 연화방(蓮花坊)의 고(故)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의 사제에 임어하였다. 1406년 1월 7일 태종이 백악(白嶽)의 성황신(城隍神)에게 녹(祿)을 주었다. 1407년 4월 20일 태종이 한성부(漢城府)에서 한성(漢城)에 대한 사의(事宜) 두어 조목을 올리니 윤허하였다. “한성(漢城) 5부(部)의 각방(各坊)이 전(前)에 방의 이름인 방명(坊名)을 세워서 변별(辨別)하여 보게 하였는데, 지금 이 것이 모두 퇴락(頹落)하였으니, 비옵건대, 방(坊)의 이름·다리의 이름·거리의 이름을 다시 세우도록 허락하소서. 한성(漢城) 안의 큰 길 이외에 여리(閭里)의 각 길도 본래는 모두 평평하고 곧아서 거량(車兩)의 출입(出入)을 편리하게 하였었는데, 지금 무식(無識)한 사람들이 자기의 주거(住居)를 넓히려고 하여 길을 침로해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졌으며 혹은 툭 튀어나오게 집을 짓고 심한 자는 길을 막아서 다니기에 불편하고 화기(火氣)가 두렵사오니 도로(道路)를 다시 살펴보아서 전과 같이 닦아 넓히소서. 한성(漢城)의 가사(家舍)가 모두 띠로 덮었고, 민가(民家)가 조밀하여 화재가 두려우니 각방(各坊)에 한 관령(管領)마다 물독인 수옹(水甕) 2 곳을 설치하여 화재에 대비하소서. 길 옆의 각 호(各戶)는 모두 나무를 심게 하고, 냇가의 각 호는 각각 두 양안(兩岸)에 제방(堤防)을 쌓고 나무를 심게 하소서.”



한성(漢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동소문(東小門)인 홍화문(弘化門), 동남(東南)을 수구문(水口門)인 광희문(光熙門), 서남(西南)을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을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한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1422(세종 4)년 임인에 상왕 태종의 명으로 토성(土城)을 모두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한성(漢城)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1422년(세종 4년) 석성(石城)으로 축조한 한성(漢城)이 낙성(落成)되었다.



동부(東部) 12방(坊)은 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이다. 남부(南部) 11방(坊)은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이다. 서부(西部) 8방(坊)은 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이다. 북부(北部) 10방(坊)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이다. 중부(中部) 8방(坊)은 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이다. 태묘(太廟)는 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 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영녕전(永寧殿)은 태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 태조(太祖)가 하늘의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니 왕(王)으로 목(穆)·익(翼)·도(度)·환(桓)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태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니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익(翼)·도(度)·환(桓)의 세 조상도 또한 이 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사직(社稷)은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 문소전(文昭殿)은 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과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화상신어(神御)을 모시고, 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대왕(太宗 恭定大王)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宋)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한성 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廟), 뒤에는 침(寢)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 문묘(文廟)는 숭교방(崇敎坊)에 있고, 뜰에 비(碑)가 있다.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 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결(結)을 주었고, 세종 13년(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경복궁(景福宮)은 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정사를 보는 사정전(思政殿), 또 그 남쪽을 조회를 받는 근정전(勤政殿), 내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밖에 있다. 홍례문(弘禮門)은 영제교 남쪽에 있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동궁(東宮)은 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궁성(宮城)은 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시각을 알리는 시보를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6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창덕궁(昌德宮)은 정선방(貞善坊)에 있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조회를 받는 인정전(仁政殿),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 광연루(廣延樓)는 창덕궁 동쪽에 있다. 수강궁(壽康宮)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종(太宗) 18년(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 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선양정(善養亭)은 창덕궁 남쪽 언덕에 있다.



혜정교(惠政橋)는 중부 서린방(瑞麟坊) 북쪽에 있다. 운종가(雲從街)는 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 통운교(通雲橋)는 관인방(寬仁坊) 남쪽에 있다. 북광통교(北廣通橋)는 광통방 북쪽에 있다. 남광통교(南廣通橋)는 태평방(太平防)에 있다. 큰 저자인 대시(大市)는 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종루(鍾樓)는 한성의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한성 좌우 행랑(行廊)은 대략 2천 27간이다. 태평관(太平館)은 숭례문(崇禮門)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이 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은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세종 12년(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館)으로 하였다. 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5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간전(墾田)은 1천 4백 15결(結)이다.



삼각산(三角山)은 한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 한성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 산정(山頂)에 사우(祠宇)가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 목멱사(木覓祠)는 한성 목멱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또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응한다. 무악(毋岳)은 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 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연희궁(衍禧宮)은 무악 남쪽에 있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세종 3년(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은 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에 있다.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은 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 선잠단(先蠶壇)은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은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은 한강 북쪽에 있다.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은 가을두(加乙頭)에 있다.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은 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동적전(東籍田)은 흥인문 밖에 있다. 태묘·사직·산천(山川) 백신(百神)의 제미인 자성(棄盛)을 제공한다. 또 구도(舊都) 개성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한강도(漢江渡)는 목멱산 남쪽에 있다. 너비 2백 보.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는데,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 나루 머리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용산강(龍山江)은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강감(軍資江監)과 풍저강창(豐儲江倉)이 있다. 서강(西江)은 서소문 밖 11리에 있다. 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강창(廣興江倉)과 풍저강창(豐儲江倉)이 있다. 가을두(加乙頭)는 서소문 밖 12리에 있다. 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 빙고(氷庫)는 곧 예전의 얼음집인 능음(淩陰)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조지소(造紙所)는 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세종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물방아인 수전(水輾)은 장의사(壯義寺) 동구(洞口)에 있다. 동활인원(東活人院)은 동소문 밖에 있다. 서활인원(西活人院)은 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한성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 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귀후소(歸厚所)는 용산강 가에 있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승려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관(棺)·곽(槨)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 흥천사(興天寺)는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흥덕사(興德寺)는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태조가 궁(宮)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장의사(壯義寺)는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밭 2백 50결을 주었다. 봉경(封境)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연(閭延)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리,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작성일:2013-11-23 11:08:06 39.118.17.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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