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댐 물 관리와 관련하여 대청댐과의 관계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대청댐은 1975년 3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81년 6월 완공되었다. 총저수용량 14억 9천만톤의 규모이며, 용담댐 건설 전에는 유역면적 4,134㎢에서 연평균 32억 2,000만 톤가량의 물이 댐으로 유입된다. 한편 용담댐은 1990년 착공해 2001년 10월 13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일까? 인공 실개천이 흐르는 도시의 한옥 마을일까. 꿈속의 배경은 여전히 산골인데 이야기는 도시의 한옥마을이 주를 이룬다. 그 한옥마을을 한쪽에 비켜두고 실개천이 흐르는 신작로에서부터 시작된 생태수업 내내 머리로는 30여 년 전의 골목을 더듬었다. 내가 시집을 간 마을은 널따란 터에 큰 대문의 조선후기양반가옥과 지붕이 아래로 길
요즈음 골프채를 잡는 사람은 물론,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매스컴을 통해 톰 왓슨, 양용은, 지은희, 최나연 등의 프로골퍼들의 이름이 낮설지 않을 듯싶다. 60이 넘은 톰 왓슨은 노장의 투혼으로 디 오픈(The Open) 챔피언쉽에서 젊은 선수들과 견주어 한 치도 뒤처짐 없는 경기를 선보여 비록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의 노장
진안군의회가 공무국외여행을 다녀왔다. 진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해외연수 자제를 요청한 행정자치부의 권고, 풍작으로 인한 쌀값 하락에 실망하는 농민의 마음과, 신종플루 확산의 부정적 분위기에도 불구, 4박6일 일정으로 물산업의 미래를 배우기 위해 공무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4년 동안 공무에 애써 온 의원으로써 선진국의 사례를 배우고자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우스갯소리로 3대 거짓말이라는 게 있다. 노인네들이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말과, 장사꾼들이 "이거 밑지고 파는 거요"라든가 노처녀가 "나 시집안가"라고 하는 말이란다. 이 말들은 본심과 관계없이 하는 입에 발린 말로 아무도 이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를테면 면죄부가 붙은 거짓말인 셈이다. 장사
공장 굴뚝의 연기가 시대의 희망으로 여겨지던 1970년대 중반. 가난을 면치 못하던 농촌의 젊은이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도시로 떠나던 시절이다. 그 시절 농촌의 아이들은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해맑은 얼굴로 뛰어놀 수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놀던 아이들에게 돈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극히 일부 애들을 제외
"앎과 삶의 일치 교육" "사유하는 교육, 줏대 있는 교육" 10월 23일에 청소년수련관에서 고병헌 씨의 강의가 있었다. 위는 그 강의의 타이틀이다. 이는 현재의 교육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그 반대로 현재 학교라는 공간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앎과 삶이, 공부와 일상이 분리되는 교육, 성찰적 사유가 없는 교육, 줏대 없
가을이 오면 나는 가슴이 텅 빈다. 올핸 봄에 땅을 갈아엎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 눈을 뜨면 어제까지 누렇게 차 있던 논이 비어있고 바라보는 나의 가슴도 무언가 한 뭉텅이 빠져 나간 것처럼 찬바람이 기어 들어온다. 거둘 것 없는 빈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농촌에 잘 못 들어온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다른 재주로도 살 수 있다지만 농촌에서 생명을 기를 수
무주와 금산 주민들의 생활용수를 용담댐 물로 취수하는 문제로 수자원공사와 주민 간에 마찰을 빚고 있다. 작년의 가뭄 때 벌건 댐 바닥이 들어난 일을 겪은 주민들인지라 정서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용담댐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용담댐에 갈수현상이 생기는 것은 물 부족이 아니라 수질보전 등의 이유로 수자원공사 측이 물 운용을 일부러 그리 하고
지금의 젊은 학부모들, 필자를 비롯하여 지금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모두 산업화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교육을 받았다. 그 시절의 교육이 추구했던 가치란 게 말 그대로 산업화된 조국을 떠받칠 최고의 인재와 인력의 양성이 아니었던가. 그 결과로 지금의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등을 성찰할 수
물레방아 폭포 수영장 등등 듣기만 해도 좋았고 막상 진행중이던 모양새를 보아하니 한결 좋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취지는 좋아다 하지만 아쉬운점이 많았습니다. 주말엔 아예 폭포며 밤에 조명도 켜지도 않을뿐더러 아마도 전기세가 아까워 평시 주말에 사람이 없으니 아예 꺼두고 그러신듯 하네요. 이 거리를 보면 밤 8시부터는 정적이 고요합니다. 사람사는 동네 같지
어느 해 가을로 기억 됩니다. 제가 사색에 젖어 왕왕 걷기를 좋아하는 길이 있습니다. 북부마이산에 위치한 연인의길이라 명명되는 그 길 말입니다. 천황문 턱밑 약수터 벤치에 앉아 여느때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였다. 칠순을 훌쩍 넘었을까요? 등산복을 마치 한복처럼 곱게 차려입고 백발이 성한 모습으로 두손을 꼬옥잡고 서로 챙겨주면서 산을 오르는 노부부가 있었습
진안신문이 이 지역에 태어난 지 벌써 10돌을 맞이했습니다. 시작은 당차게 출발했지만 주위의 여러 어려운 여건 가운데 때로는 실망과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지나온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난관에 굴하지 않고 지역의 생생한 목소리와 현안을 건강하게 담아내는 진안신문의 열정에 감동하며 독자로써 경의와 축하를 드립니다. 마을과 지역의 아름다운
10여 년 전 친척의 결혼식 하객으로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며 여기저기를 구경하든 중 로비의 신문 진열대를 보니 전국지로는 <유에스 투데이> 한가지와 기타 이름도 모를 지방지들만 꽂혀있고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하여 익숙한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진안신문을 구독한 지 5년이 지났다는 전기홍 씨를 만났다. 진안신문이 창간 10주년을 맞았다는 말에 벌써 그렇게 됐냐며 놀라는 기색을 보인 전 씨는 3년 전 쯤 진안신문에서 기획한 '옛길 걷기'를 흐뭇한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진안신문 김순옥 사장을 비롯해 기자, 기관단체장, 주민 등 여럿이서 동향면 성산리 일대의 옛길을 걸었을 때가 가장 기
박수우 대표를 처음 만난 건 신문사에 입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취재를 끝내고 오는 길에 박 대표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다. 그때 박 대표는 그의 궁금증에 답변하는 나의 어눌한 말투를 들으며 "기자가 왜 그렇게 말을 못해요."라는 핀잔과 함께 진안신문에 대한 못마땅한 점도 늘어놨었다. 10주년 기념하는 인터뷰에 박 대표가
"기사에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한 건 2004년이에요." 김춘희 사무국장은 오타를 발견하거나 문제가 있어 보이는 기사를 읽으면 진안신문사에 익명으로 전화할 만큼 진안신문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신문을 받아보면 사진부터 훑어봅니다. 그 다음에 제목을 읽고 체크를 한 다음에 관련 기사를 읽는 순입니다. 중요한 기사는 복사를 해서 다
김명갑 씨는 진안신문이 군민의 알권리를 더 많이 충족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진안신문이 언론의 기능을 충실해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도 진안신문이 군민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지만 좀 더 열심히 발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편중되지 않는 기사를 독자가 읽었으면 합니다.
지역아동복지센터에서 일을 해오다 6개월 전부터 진안군지역사회복지협의체에서 간사를 맡고 있는 김두호 씨. "처음에는 유료 구독자는 아니어서 불규칙적으로 아파트에 배포되는 신문을 하루 이틀 읽기 시작하다보니 신문의 재미를 느꼈어요. 매주 바뀌는 수화나 세상읽기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자녀 셋을 둔 주부이기도 한 그녀에게서 지역 주부들의 신
진안신문 창간 초기부터 구독을 했었다는 장훈석(70) 씨는 3년 전 구독을 해지한바 있었다. 군정자문위원, 민주평통자문위원 등 20년간의 지역사회 활동에서 물러나면서 구독도 해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지난겨울 우연히 취재 요청을 받으면서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신문 내용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고 한다. "예전엔 솔직히 진안신문이 좀 시시하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