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734년(신라성덕왕 33년) 唐나라 헌제에게 하정사를 보내어 인삼 200근을 선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에서는 소백산에서 산삼이 많이 자생한 것을 알 수 있고 그 이후에는 중국에서 인삼을 요구하는 횟수와 수량이 점차 증가되어 선물에서 의무화한 공물로 바뀌어 농가에서는 인삼의 채굴로 폐농이 되고 전답을 팔아 인삼을 사서 바쳐야
괴산지방은 대부분이 산지이므로 산간에 얼마간 형성된 분지와 하천의 유역에 평지가 있고 또한 서북쪽 일대는 田地가 전개되어 있다.6년 근 고려인삼은 원래 개성 이외의 지방에서는 대대적으로 재배한 곳이 적었으나 광복이 후 고려인삼의 본 고장인 개성이 북쪽에 속하게 되고 또다시 6· 25동란 이후에 삼업재건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자 한편으로는 국가
부여에 인삼밭이 처음 생긴 것은 해방되기 6년 전쯤 일이였다. 일본인 6-7명과 이 지방 전일만(田一萬) 노갑성(盧甲成) 이석태(李錫泰) 등 20 여명이 합자하여 부여군 규암면 압송리에 인삼 1만평을 심었던 것이다.이들이 개성출장소 알선으로 묘삼을 개성에서 가져다 심자 충청남도에서는 인삼경작 전문가들을 초빙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충청남도에서는 개성출장소
3). 김포 인삼경작조합의 연혁 인삼의 재배는 6· 25동란 후 개성. 개풍. 장단지방의 삼농인들이 강화를 거쳐 입주함으로 인하여 김포군 일대에 약 1000핵타의 재배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양직삼(養直蔘) 種의 특산지로 되어있다. ○. 1957년 7월 10일: 개성삼업조합 재건으로 홍삼원료 생산지역 책정 ○. 1960년 5월 10일: 개성삼업조합
1950년 6· 25동란으로 개성은 북한 수중에 들어가고 개성시민들은 남하 하면서 삼업은 또 낯설은 땅에서 뿌리내리기 시작 하였다.1957년 서울 수복으로 다시 모인 개성 출신 삼업관계 인사들은 부전자업(父傳子業)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당시 손홍준(孫洪駿)을 비롯 이종철 한종석 장화동 이상득 김진원 김용남 이재호 등 제씨의 노력으로 개성삼업
1780년대 송도지방 삼포에서 수삼(水蔘)을 채굴하는 시기에는 한성에서 궁내부 주관으로 관군(官軍)을 파유하여 감시하였고 채굴한 인삼을 운반하여 홍삼을 제조하되 궁중에서 주관하였으나 송도지방의 삼농동업인(蔘農同業人)들 사이에서는 지방산업의 유치와 도난방지 병해로 인한 손해 등으로 인삼업은 곤란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 후 삼업의 부흥을 위하여 삼농인들은 협동
고려인삼이 현재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져 자랑스러운 한국 고유의 특산물로 해외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나 일제치하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1925년 경 고려인삼을 제조하던 총 본산은 "조선총독부전매국 경성지국 개성출장소 홍삼제조공장"이었다. 당시 이 홍삼제조소의 주소지는 개성시 태평동 1번지였다. 총독부시절 어느 관청이던 마찬가지였겠지만 원래
한국 인삼은 국내외에서 "고려인삼(高麗人蔘)"으로 통하고 있다. 인삼은 원래 자연생삼을 인위적으로 기르는 포삼(圃蔘)으로 된 것인데 고려 때부터 소규모 포삼이 시작되어 고려삼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 같다. 또 중국 대륙에 우리나라산 인삼이 고려이삼으로 유명해 진데 연유가 있을 것 같다. 삼국(三國)의 통일신라시대부터 인삼의 약효가 외국에
그런데 정조, 순조시대에도 가끔 가짜 산삼이 세상에 나와 화제를 던졌던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가짜에 속지 않고 진짜를 밝혀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면 아무래도 인삼을 많이 만져보고 다뤄본 인삼 상인들이 일단 전문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전문가들조차도 때로는 인삼과 도라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경우
천하의 이재(異才)라 하더라도 돈을 벌어낼 거리(자료-인삼)가 넉넉지 못한대야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겠는가? 결국 임상옥을 탄생시킨 것이 인삼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인삼의 황금교역 시대가 왜 순조시대에 꽃을 피웠고 그 인삼을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또 어떤 변천적 함수 관계를 지녀왔는가 하는 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인삼아 인삼아말을 해라팔도 갑부도
조선시대 인삼하면 누가 무어라 해도 순조 때에 이르러 꽃이 피었고 이 시대를 배경으로 우리 역사상 최대의 인삼거부(人蔘巨富) 임상옥(林尙沃:정조3년1779-철종6년1855)이 탄생 되었다. 우선 순조 말엽부터 헌종 초에까지 의주 만상(義州滿商)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청(對淸) 무역이 되었던 인삼의 교역량은 8천근-4만근에 이르렀다.당시 인삼 1근 값은 은자
〔작은 것부터 고쳐야 경제 회생〕이후 영문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하다 보면 사정은 더욱 나쁘다. "Insam"(인삼)이 아니라 "Ginseng"(진생)이라고 검색어를 넣어야 50개 정도의 자료가 뜬다. 다분히 "비타민제"와 같은 "건강영향제"의 물품들인데 개중에는 "코리아진생&q
오래된 이야기로 이어령(전 문화관광부장관 : 이화여대 석좌교수 시절)교수의 「루소와 고려인삼」이란 제하의 동아일보(2000. 12. 1)에 게재된 글을 살펴보자. "세계 펜클럽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선물로 준 인삼차가 호텔 방마다 버려져 있었다 한다. 인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서양 문인들에게는 그것이 귀찮은 짐으로 밖에 보이지 않
인삼이란 인류역사와 더불어 신약영초(神藥靈草)로써 자연 약종(藥種)의 왕자로 전해 내려왔다. 이는 수천년 전부터 사람들의 여러 가지 질병을 고치거나 미리 막는데 널리 사용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약재이다. 뿌리가 "사람을 닮았다" 하여 그 이름도 인삼이라 불리워졌고 인삼은 약효가 하도 신비로워 "신초(神草)" 기름진 이
◆진안 인삼의 삼포고사(蔘圃告辭) 진안지역에서는 100여년전부터 인삼을 심으면서 삼포에서 고사(蔘圃告辭)를 지내던 풍습이 기록으로 남아있어 오래전부터 이어온 풍습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 내용은 <정은집(靜隱集)> 정은 이병항(靜隱 李秉恒 1862-1946) 주천거주의 문인의 문집에 나타난 "삼포고사"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속칭하는 비결록에 <高東龍西 鎭北之間 有萬人 可活之地(고동용서 진북지간에 유만인 가활지지)>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고산동쪽 용담서쪽 진안북쪽 사이에 만인이 가이 살만한 곳이 있다」이는 곧 지금의 운장산 밑 일대 (오늘의 주천면 개화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흔히 일컬어지는 피난지처에도 두 종류가 있다.그 하나
속칭하는 비결록에 <高東龍西 鎭北之間 有萬人可活之地(고동용서진북지간에 유만인 가활지지)>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고산 동쪽 용담서쪽 진안 북쪽 사이에 만인이 가히 살만한 곳이 있다」 이는 곧 지금의 운장산 밑 일대(오늘의 주천면 개화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흔히 일컬어지는 피난지처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
고려시대 동복현 (현 전남화순군동복면)에 거주하전 최씨가 중병에 걸려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였으나 백약이 무효라 이제는 황천길만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그의 처가 산신에게 낭군의 병이 완치 되도록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밤 꿈에 산신이 나타나 모후산에 가면 명약이 있으니 그것을 쓰라고 하였다. 그 부인은 그 곳에 가 본즉 사람의 형태와 비슷한 초근(草根)을
3) 금산. 화순동복 인삼과 진안 인삼과의 연관 관계○금산 개삼터의 유래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개안리(開眼里) 마을에 지금부터 250여 년 전 "진악산 관음봉 아래에서 姜氏 姓을 가진 사람이 산신령의 계시로 인삼을 시작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금산군지> 1987넌 간행<-문화유산으로써의 금산곡삼-김순기정->에
◆금산·화순동복 인삼과 진안 인삼과의 연관 관계 문헌적인 조사를 통하여 금산인삼과 동복인삼 그리고 진안인삼의 연관성을 추적 하였으며 백제 삼으로서 지역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구전 조사 및 문헌 탐색을 실시하고 이에 대한 내용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정리해 본다.○진안 인삼의 역사적 고찰진안지역 인삼의 역사는 고려 말 일곱 도인이 칠은리 농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