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재배의 역사 ( 2 )우리나라 인삼재배가 일찍 이루어진 곳이 송도나 경주 지방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대 이 두 지방은 망국의 옛 도읍지란 점과 특히 송도는 조선조에 들어서도 고려 이래 해외 무역의 거점지로서 대외 상권을 장악한 곳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류의 삶이 사냥 시대를 청산하고 분격적인 농업시대로 들었을 때를 상상해 볼 때 인구
2). 인삼 재배의 역사 ( 1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朝鮮相識問答>에 "옛날 우리나라는 어디서나 자연생의 삼이 많아서 1년에 수 만근을 채취하여 그 것을 주고 일본에서 은(銀)과 동(銅)을 사다가 그대로 중국에 팔아 이익을 얻고 또는 이것을 주고 중국에서 생사와 주단을 사다가 그대로 일본에 팔아 이익을 얻어 국제 무역을 행하니 수 백
1). 들어가면서 진안지역의 대표적인 특산품인 진안 인삼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진안 인삼의 경제 수단으로서의 가치부여 및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더욱이 자연 삼 혹은 재배 산 삼류(장뢰삼 포함) 의 비공식적인 산출과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 특성상 이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와 재배 적지 등의 학문적인 근거가 절대 필요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진안
8.15 해방이후 1956년 "풍기삼업조합"이 설립(1908년 창립되었다가 해체 되었다.)되어 반곡삼(半曲蔘)이란 상품을 개발하여 풍기인삼(신라삼)의 특징을 살려 홍보하니 국내외에서 그 성가를 인정하게 되자 백삼의 유통은 「개성삼업조합의 직삼」 「금산삼업조합의 곡삼」 「풍기삼업조합의 반곡삼」으로 각기 특성을 살려 판매 전략을 개척해 나갔다
4. 홍삼가공검사그러나 이후 1975년과 1977년 두 차례의 홍삼전매법이 개정 되었으며 1988년에는 인삼사업법 전문을 개정하여 고려인삼의 옛 명성을 찾아 수출 확대로 경영혁신을 기대 하였으나 누적된 각종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어 재배농민과 전매당국과의 불신으로 원료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고 수출 시장은 날로 위축되어 더 이상 기대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 홍삼전매법 제정요지본법의 제정 요지는 홍삼제조는 정부 직속으로 하고 판매 또는 수출은 정부의 면허를 받아야 하며 경작도 승인을 얻어야 할 수 있고 본 규정을 위반 할 시는 벌금에 형사처벌과 현품은 몰수하는 등 강제 규정을 두고 홍삼제조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수삼은 정부에서 수납하고 일정의 배상금을 교부하는 등의 "전문25조"와 부칙으
고려 말 이후 조선조 중기만 해도 인삼의 무역은 나라 살림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재배 기술의 발달로 무역량이 증가 되자 보관이나 운반에 편리한 제조방법의 개발로 포소(증포소)를 설치하여 홍삼을 가공하고 햇빛에 말리는 백삼을 가공하면서 거래 물량이 증가되자 조선말에는 삼정(蔘政)의 문란으로 국경지역에서 인삼의 밀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관리들의 횡포
인삼의 재배는 서민들이 주로 하기 때문에 기록에 남기지 못하고 자칫 잘못 전해지면 인삼재배로 인하여 화를 초래 할 수도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 비밀리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 왔으므로 설화나 전설만이 오늘까지 남아 있다. 한편 각 지역의 인삼재배의 연혁을 살펴보면 금산은 원래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으나 196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청남도 최남단을 이루고 있다.
1. 시작하면서인삼이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신약영초(神藥靈草)로 자연약초의 왕자로 전해져 내려왔다. 중국의 「신농씨(神農氏)」가 인체의 질병 치료와 보건을 위하여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많은 풀을 핥아보며 하루에 70여회나 중독을 당하면서 스스로 체험하여 2000여 년 전에 저술된 의학 (醫學)의 최고전(最古典)인 에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