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석 훈 씨
정천면 갈용리 농산마을 출신
연세민약원 대표
강동구·진안군교류주민위원회 위원
재경정천면 향우회장

 

옛말에 당구삼년폐풍월(堂拘三年吠風月)이라 하였다던가.
임석훈씨 그를 만나서 이야기하며 함께 공유하는 동안 필자는 항상 해박한 유교의 체계에 다듬어져 있는 그의 몸가짐과 지식에 관하여 함몰되어 감을 느끼곤 하였다.
“유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입니다. 자기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아가는 윤리의 학문이며 민중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문이기도 합니다. 유(儒), 불(佛), 도(道) 명칭으로 교화적인 면을 중시하여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인(仁)을 그 근본사상으로 하는 공자께서 시작하신 정교일치의 학문적 사회지배사상이지요. 유교의 대표적 윤리사상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오륜사상입니다. 대개의 우리 민중들이 그들의 생활속에 깊숙하게 자리잡혀 깊은 영향과 변화를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속에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제 세월이 이렇게 혼란스럽게 바뀌어 가면서 차츰 그 마음들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필자가 임석훈씨에게 종교와 신앙에 관하여 물었을때 그는 자신의 종교에 유교를 대입하여 그렇게 답하였다. 따라서 자신은 선영을 섬기는 자손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집안의 가계를 따라서 당숙에게 양자되어 있는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으며 새로운 종교와 신앙에 심취되어 조상 모시기를 거부하는 집안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못내 섭섭해하는 임석훈씨를 보면서 어쩌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 집안의 문제만은 아니겠구나 생각이 되었다.
1939년생이라니 이제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인가 하였더니 아직도 초롱초롱한 인생의 설계를 제시한다.
정천국민학교를 마치고 정천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둔것도 그당시 집안의 형편에 순응하여서였단다. 4월에 벚꽃이 지고 갈아엎을 들녘의 논바닦에 자운영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면 임석훈씨는 배고파 헤메던 논두렁 길을 걸어가며 넘겨가던 보릿고개의 추억을 잊을수가 없다.
입에 풀칠할만큼에도 모자라는 논농사에 3남2녀의 가족은 가족모두에게도 정말로 힘에 겨운 당시 농촌의 실정이었다. 때로는 수동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촬영하고 현상하여 그것으로 꿈을 이어볼까 하였던 그런 20대의 시절도 그에게 있었다.
군에 입대하여 금호강에 멱 감으며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져간 고향 농산마을의 앞 냇가를 그리워 한 적도 있었으며 그렇게 어쩌면 무던히도 평범하게 살아온 임석훈씨가 제대하여 일가를 이루면서 변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난다.
임석훈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항상 간직하고 있는 그 표정의 그 뒤안에는 그의 곁에 생활처럼 남겨져 있는 유교사상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도 찾아볼 수가 있다.
임석훈씨는 이야기한다.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군자의 교화를 받아서야 비로서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자를 유교에서는 소인이라 합니다. 나는 항상 내가 소인인것을 깨달으면서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임석훈씨 자신이 갖고 있는 민중대열의 일원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동모시절,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에서 시작하여 명심보감에 이르기까지 잠깐 한학을 수학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 임석훈씨는 자신의 당구삼년폐풍월(堂拘三年吠風月)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웃는다.
임석훈씨가 이렇게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던 자신의 운명을 찾아서 그것을 내 것인양 그렇게 편안하게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였으나 막상 서울의 생활은 형극의 길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필경과 프린트 전문업소였던 서라벌 문예사에서 조금 발전하여 인쇄를 겸한 동일문화사 시절을 거치면서 차츰 서울의 생활에 익숙해져 간다.
방원가시(方圓可施)라 했다던가.
“내가 베풀려하니 언제 어디서나 기회는 있다.” “항상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기회가 되어서 내게 닷 돌아온다.” 임석훈씨에게 필자가 생활철학이거나 인생의 좌우명을 하고 어렵게 물었을때 아주 쉽게 대답해 준 이 이야기가 그에게는 정말 평생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좌우명이라 했다.
그가 그랬다. 열심히 불평없이 앞만 보고 성실하게 일해온 그에게 거래처였던 사립 동덕여중고등학교에서 일자리를 제의해 온 것이다.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스카웃’된 셈인데 어찌되었건 그 학교의 서무과에 평직원(필경사)으로 취직이 된 것이다. 몇번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취업과 재취업 등의 와중에서 홍익대학교 미술교육원 서예과정 4년을 수료하는(1990~1994) 끈기도 보이면서 쉽지 않은 20년 정년을 마치고 현재의 업종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즐거운 마음을 갖고 고향을 섬기면서 살아가겠노라 말하고 있다. 지나간 인생을 짚어보았더니 성공한 것 같은 인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결코 실패한 인생은 더욱 더 어닌것 같단다. 평생을 반려해온 부인 권조자씨와의 사이에서 2남1녀의 2세를 두었으며 그 애들도 그가 상경의 제일 이유로 꼽았었던 교육문제로도 자신의 뜻한 바 있었던 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석훈씨는 말한다. 그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영을 섬기는 자손이 되거라. 섬기는 자손은 반드시 번창한다.”
수몰되어간 고향으로의 귀향을 그는 항상 잊지 않고 있다. 용담담에 파문지워가는 물결을 내려다보며 왠지 서러운 마음은 조상에 대한 미안함때문일까? 회짐때문일까?
(H.P : 018-514-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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