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화 남씨
정천면 월평리 상초마을 출신
한마음병원장례식장 대표
전국장례협회 이사
동대문구 답십3동 주민자치위원 및
구립경로당 자문위원회 부회장
재경정천면 향우회 회장 역임
재경진안군민회 부회장

 

오리나무란 것은 십리밖에 섰어도 오리나무요/고향목이라는 것은 화관에 섰어도 고향나무요/북이라 하는 것은 동서사방에 걸려서도 북이고/새장고라 하는 것은 억만년 묵어서도 생장고로고나.
김화남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가끔씩은 이러한 시가 생각나서 저절로 웃을때가 많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무’에서 만물과 우주가 나왔고 그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고 모든 것을 있게하는 오묘한 무(無)가 아니던가. 이 세상이 고해이고 그 고통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일찌기 순복음교회의 열성적인 신자였었던 그가 종단의 분쟁에 실망하여 불교쪽으로(도선사) 아주 정반대의 전향을 한 것도 어찌보면 그의 인생의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였을까 하는 이해로 대신한다. 처음 많은 번민과 잡념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들이 종종 있었으나 이제 마음을 편하게 가질수 있던것도 그가 집착의 번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란다.
김해김씨 삼영공파 17손인 김화남씨는 1943년 4월 30일생.
정천국민학교, 정천중학교를 거쳐서 진안동고에 진학하였으나 5남2녀였었던 당시 그의 가정형편은 그가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을만큼 여유롭지를 못하였다. 열여덟되던 해 전주에 삼천동의 김삼영농장에서(배, 사과농장) 일하며 어찌하면 학업을 이어볼까하는 꿈도 있었으나 그에게 그러한 기회는 영 오지 않았다.
그즈음 시골에 한창 유행하였던 4H운동에 참여하여 이리농촌진흥원에서 지금은 이름도 잊었으나 출강하던 강사로부터 직업데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름을 잊어버린 강사는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박지원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은 것이 양반전, 예덕선생전, 허생전, 그런 이야기였는데 김화남씨는 자신의 무지와는 달리 그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자신의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도성에서 분뇨를 수거하여 교외의 채소농가에 거름으로 내다 파는 엄행수의 이야기. 더럽고 천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엄행수의 인생철학이 새롭게 그에게는 미덕으로 마음에 담겨왔다. 경제적 몰락으로 인하여 양반의 신분을 상품으로 팔아야하는 정선양반의 이야기 양반전. 가난한 선비가 돈을 벌어 이상촌(유토피아)을 건설하여 빈민들을 구제하는 허생전 이야기. 인의도덕을 표방하면서 실상으로는 사욕을 위하여 약탈하고 살육하는 인간을 꾸짖는 동물들의 이야기. 때로는 자신이 그러한 사람인양 그렇게 살아오는 착각을 그는 가끔씩 느낀다. 그리고 그러고도 싶단다.
김화남씨는 20세에 육군에 지원하여 우선 병역을 필하는 것이 국민의 길인것을 깨닫는다. 제대하고는 4H적 눈익혀 두었던 고성금여사와 결혼부터 서둘러하고는 일단 상경을 서두른다. 처음 보관동 현장에 막일로 시작하여 생계를 이어간다. 경동시장의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3년을 일하고 자동차정비사 자격증을 따낸다.
인간이 때로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자신의 인생을 담보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하게 본다. 김화남씨의 인생이 그렇다. 그가 앰브란스 한대를 어렵게 구입하여 서울대병원에 진입한 것이 그의 오늘을 찾은 것이다. 마포 합정동 순복음교회 의료부에서 7년동안 을지병원 장례식장에서 주로 지방환자 수송업무를 맡고 있었다.
한때 연암선생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돈 많이 벌어 고향에 돌아가서 이상촌을 세우겠다 마음먹었던 김화남씨. 그가 이렇게 장례업계에 빠져가고 있었다.
김화남씨는 3남매를 두고 있다.
아이들 중의 어느 아이래도 자신의 이 업을 이어받겠다고 나선다면 자신은 서슴치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다.
김화남씨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 보니 실패한 인생으로 규정하기가 옳지 않다고 생간한다. 자신의 본심을 갖고 지금껏 솔직하게 거짓없이 살아온 것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없이 긍지를 갖고 자신의 직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고 강하게 강조한다.
그는 가끔씩 장례식장에서 일어나는 형제들 또는 인척들의 싸움을, 그것도 사생결단하는 싸움들을 목격할 때마다 인간의 추한 모습과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서 전율할 때가 많다고 술회한다.
그는 오늘도 인간의 마지막을 지키는 현장에서 인간을 고뇌하며 인생을 익힌다. 멍청하거나 무식하지 않고는 지켜낼 수 없는 순간순간들을 그는 무식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인간에게 이상촌이거나 ‘유토피아’는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그의 아이들이 자신의 유골을 모시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 고향의 산하에 뿌려주기를 그는 간절히 바란다고 말할 때 석양을 지켜보는 인생의 재넘이에 서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H.P 011-240-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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