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백철욱씨
백 철 욱 씨
·주천면 무릉리 어자마을 출신
·방통대 법학과 전국 총동문회장 역임
·주천면 무릉리 향우회장 역임
·진우회장역임
·재경주천면향우회장(15대)역임

백철욱씨의 고향 무릉리는 주위의 산천이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谷)을 닮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무릉리는 3개 마을로 구성되는데 모두 운정에서 뻗어 내린 줄기에서 별항(게목 639m) 아래에는 양촌과 강촌, 선봉(699m)아래에는 어자(漁子), 끝자락인 관봉(731m)아래에는 선암(立岩) 마을 등이 형성되어 있다. 맑은 계곡에서 물소리도 요란하게 들려오고, 산천어들이 떼를 지어 유영(遊泳)하는 물줄기는 모두 합쳐져서 삼거리를 거쳐 운일함 반일함으로 흘러간다.

본래 여기는 용담군 이서면 어자리라 불렸는데 해방 후 진안군 주천면 무릉리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전설처럼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거의 한 세기 이전에 무릉리로 들어가는 길목인 삼거리에서 홍수가 일어 무위암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무위암에서 무릉으로 왔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던 간에 고동(高東:고산의 동쪽), 용서(龍西:용담의 서쪽), 진북(鎭北:진안의 북쪽)지간에 위치한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백인원(83)씨를 아버지로, 안중숙(85)여사를 어머니로, 수원백씨 인주공파 28대손 백철욱씨가 3남1녀 중 장남으로 1949년 11월7일 이 세상에 태어난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인고(忍苦)의 세월에 순종하며, 그 시절 농촌의 아이들이 모두 한번쯤은 마음속에 새겼음직한 배움에 관한 향수가 어찌 그에게는 없었을까? 도회지로의 가출도 어린 그의 마음속 시나리오에는 항상 있었겠지만 모든 여건상 행동으로 착수할 용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았단다. 어른들이 권유하는 서당도 그의 마음에 흡족하게 다가오지를 않더란다.

그러한 고민 속에서 대불초등학교 무릉분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까지 한글조차 해독하지 못하는 늦깎이 학생이 되어 있었던 그였지만, 그가 일취월장(日就月將), 주천고등공민학교(현 주천중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치고, 그리고 금산농고를 자취하며 부모님의 눈치도 살피면서 어렵게 졸업하는 동안 인간이 얼마나 가난해질 수 있는가를 체험한 보릿고개도 넘어 보았고, 입도선매, 장릿벼 같은 세월의 용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거들던 1년 동안 그 현실과 농민들의 고통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처절한 상황인 것을 체험하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1년여의 반거충이 생활을 청산하고 군에 입대한다.
그는 국군의 방송이 전하는 공군하사관 모집의 조건들이 그의 자격이 충족하는 범위에서, 그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당시 그의 마음에 얼마나 배움에 관한 목마름으로 차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미국유학도, 대학진학도 제시하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킬 만큼 신나는 사항들이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들이 제시한 합당한 그 자격요건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그의 꿈을 가로막고 있었다.

1976년 7월 31일 공군중사 전역원을 내고 그 만큼의 세월을 가슴에 묻었다.
현역복무 중 가장 잘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아내 정희(57세. 무안)씨와 결혼한 것이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전역 후 또 다른 반거충이 생활이 시작 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취업사기극의 피해자가 되고서는, 한 번 더 인생을 반성하는 작은 기회가 되었다고 백철욱씨는 말한다.

「내겐 어디 내놓을 뚜렷한 기술도 그렇다고 학력도 없지 않은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우선 열심히 공부에 임하자. 독학이다. 공무원 시험에 죽을힘을 다하자.」
백철욱씨는 열심히 노력 하는 것이 자신의 배경(백그라운드)이라고 생각했단다. 가끔씩 외로움을 느낄 때면 고향사람들의 모임에도 나갔다. 그가 살던 옛 고향의 선, 후배를 모아서 향우회도 조직하고 고향을 위해서 내가 또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했다고 했다.

백철욱씨는 다시 말한다.
「꿈은 삶의 목표이고 그 꿈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며 베푸는 것은 삶의 가치이다.」
1976년 7월 1일 서울중앙지검 검찰서기보로 시작한 그는 방송통신대학 법학과를 마치고 경희대학교행정대학원 석사과정과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과정을 2010년 2월 이수하고 검찰부이사관으로 연민의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있었다.

우리의 고향사람 백철욱씨
인간선경(人間仙境)의 동네 그의 고향 무릉리에는 미수(米壽)를 바라보시는 그의 양친(兩親)께서 옛집을 지키고 계신다. 그는 가끔씩 부모님을 찾아서 고향을 간다. 양지바른 안방의 툇마루에 아버지의 늙다 못해 어린애처럼 가늘어진 손목을 잡고 있노라면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하며 불효를 애달파 하던 옛 선현의 이야기들이 연민(憐愍)으로 가슴에 다가 온다고 했다.
가난하던 그 세월 논, 밭 갈며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중얼거림이 자꾸만 그의 귓가에 서성거린단다.

바람 불고 서리치고 눈 오고 얼음 어니/입성 땔감 준비하면 다른 걱정 없으리라.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남았던고/몇 섬은 환자 갚고 몇 섬은 왕세 내고
멥쌀은 얼마 두고 얼마는 씨를 두고/도지는 되어내고 품삯도 갚으리라
장리벼와 곗돈까지 몫몫으로 떼어내니/엄부렁하던 것이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일 년 동안 지은 농사 반년양도 될까 말까/부녀자들 또 할 일이 메주 쓸 일 남았구나
푹 삶아 찧어 뭉쳐 띄워서 재워 두고/동짓날은 팥죽 쑤어 이웃 함께 나눠먹네.
새 책력 반포하니 내년 절기 어떠한고/해 짧아 덧이 없고 밤길이 지루하다
공채 사채 상환하니 과리들도 아니 오고/사립문이 닫혀있어 초목이 한가롭다.
짧은 날에 끼 챙기니 다른 틈 절로 없어/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하옵나니
베틀 곁에 물레 놓고 앗고 타고 잣고 짜며/자란 아이 글 배우고 어린 아이 노는 소리.
노인네는 일 없으니 기직이나 매어보세/외양간 살펴보아 여물을 가끔 주고
짚 넣어 받은 두엄 자주 쳐서 모으리라/
아! 아! 수구초심(首丘初心) 그리워라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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