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정인영 씨
정 인 영 씨
백운면 동창리 동신마을 출신
백운초 제39회 동창회장 역임
『(주)백운 포리머』 대표
재경백운향우회대외협력위원장


어느 날 무심코 전철역에서 읽어본 어느 낯 선 시인의 시 한편이 그의 가슴 속에 잠자고 있었던 향수(鄕愁)의 흔적을 일깨워 준다. 그는 고향의 작은 들녘에 피어 있었던 들국화를 고향처럼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너를 바라보면/떠오르는 이름이 있다./아득히 사라졌던 기억들이/해마다 찾아와서/그림자밟기를 하고/마음은 보내지 못하면서/보라색 손수건 흔들며/배웅하는 네 눈물 속에/올해도/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어릴 적 하잘 것 없어 보였던 그 들녘의 들국화들이 문득 그리움으로 변하여 온 것이다.

우리의 고향사람 정인영씨.
그의 고향 원동창 마을은 진안의 8명당 중 5명당이라고 전한다. 갈미봉에서 내려온 줄기가 고깔봉을 거쳐 호두성산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호두산에는 오마탈안(五馬脫鞍)형국이 있다고 전해 내려온다. 동창이란 명칭은 이 마을이 백운면 동쪽에 위치해 있고 창고가 많이 세워져 붙여졌다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면 소재지였다.

정인영씨는 이 마을에서 아버지 정진표씨와 어머니 김미봉 여사의 2남5녀 중 여섯 번째로 1958년 정월 동래정씨 안산공파 34대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다. 백운초등학교와 마령중학교를 마치고 그가 전주의 전라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기 까지 그는 아버지의 지방유지로서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개념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그의 부친께서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 나갔다가 어떤 인연으로 전북도청에서 근무하고 계셨는데 1950년의 6.25국란에 쫓겨 고향으로의 피난한 것이라고 정인영씨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피난길이 고향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 그의 부친은 생활수단으로 전북여객과 삼남여객의 지역정류소장과 전북일보지국장등으로, 모친은 삼거리 동창상회를 운영하시면서 생계를 이끌어 가정의 내조에 나섰다고 정인영씨는 당시 어머니의 고생담을 들려준다.

정인영씨는 그의 양친께서 어떻게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하였으며 크게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그들의 시대와 품위에 맞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루어 왔는가를 말한다. 수신(修身)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함이다. 제가(齊家)란 수신(修身)함으로서 가정을 다스림이며, 가정을 화목하게 운영하는 사람이 사회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자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었다는 자랑이다. 자식은 자식으로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어머니는 내조자로서 모두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을 때 이것이 곧 수신(修身)이고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것임을 그는 강조한다. 후일 그의 부친께서는 어렵다는 산판사업을 운영하고, 정미소를 경영하며, 진안경찰서자문위원과 백운초등학교 기성회장으로, 백운중학교건립추진위원장, 당시 지방자치기구인 면의회 의장 등 지방유지로서의 품위를 다 한 것은 그 의미의 평천하(平天下)가 아니겠냐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전주에서 전라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인영씨는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고 상경한다. 그리고 4년 과정의 대학을 졸업하기까지의 10년, 그 각고(刻苦)의 세월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일년 다니고 휴학, 1년 다니고 입대, 또 2년 다니고 휴학, 그 10년 세월 속에 담긴 사정을 그는 인생의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다. 논문대필, 차드사, 가정교사, 고지대 연탄배달,…
또 헤아릴 수 없이 더 많은 그 노동들과 행상들의 의미, 장학금으로 이어가던 그 나날들, 그리고 1986년 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는 혼자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자신의 앞날을 하늘에 그려보고 있었다. 다음해, 1987년 그는 고지대 아파트 연탄배달 시절 고객으로 만나서 사귀던 아내 최경희씨(정읍,50)와 결혼하고 서울과 안산에서 전셋집과 무허가촌을 전전하기14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더라는,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면 안 되는 일이 없더라는 작은 진리 앞에서 인생의 작은 값어치를 깨달아가고 있었노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효성그룹 동양나이론 영업사원을 마지막으로 1992년 『백운(白雲) 포리모』를 창업하고 19년차 기업인으로 시대가 만드는 인간들의 배반(背反)과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사각지대 속에서도 자신만의 인생의 길을 걸어왔노라 그렇게 자신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들 일곱 남매에게 두 구절의 유훈(遺訓)을 남겼다고 그랬다.

「화합하라,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라.」
형제가 세상을 살면서 항상 화목(和睦)하라는 그 뜻 그들은 잘 지켜가고 있다고 했다.
상대방을 베려 하지 말고 배려하라. 재물은 다시 복구할 수 있으나 인심은 천금으로 복구하기 어렵다는 그 뜻을 그는 지켜왔다고 했다. 그는 항상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장사꾼 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인간관계의 사업에 더 충실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고 그랬다.

우리의 고향사람 정인영씨
그는 요즘 지천명(知天命)의 연륜을 맞아 가끔씩 찾아오는 삶의 가치관에 관한 외로움에 빠져들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형님께서 불가에 귀의 하시고 출가하신 이 후 바람이 부는 것으로 문득 자신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항상 그의 가슴에 남아 있음이라고 그랬다. 그럴 때 마다 우리의 고향사람 정인영씨는 그의 형님이 떠나면서 들려주던 나옹선사의 한시 '청산혜요아'를 입속에서 중얼거려 본다고 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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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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