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호 진솔대안학교 교장

김동민 일병으로 야기된 군부대 총기난사사건으로 6월이 떠들썩했다. 그 원인에 대하여서 국방부도 언론도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은 고사하고 그 원인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선임병의 욕설 때문이라느니 광범위한 군내 인권문제 때문이라느니, 기강의 헤이문제라느니 심지어 김동민 일병의 정신적인 문제라느니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 또한 이를 기화로 인터넷상에 전경부대, 해병대등 군부대 내 가혹행위의 사진이 유포되어 군내 인권문제의 광범위성과 심각성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필자는 김동민 일병의 총기난사사건의 원인을 생각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는 70년대 후반 출생한 이후 세대부터 심화된 부모들의 양육태도가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가정교육의 문제이다. 70년대 후반, 80년대 90년대에 아이들을 출산한 세대의 주민등록의 앞자리는 50년대 60년대 출생한 세대들이다. 이들은 전쟁의 폐허를 딪고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틀인 대가족제도하에서 가난한 시대를 이기려는 부모세대들에게 대가족제도의 틀안에서의 양육을 받고 성장했다. 나 보다는 우리를 배우며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배우며 풍요함보다는 빈곤을 체험하며 누림보다는 나누고 절약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역시 당시 시대가 요청한 필연적인 사역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 당시는 재벌가의 몇몇 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근면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빈곤한 사회였다. 그래서 가정이든 학교든 지향하는 교육적 가치가 스스로 돕는 자, 자유보다 책임을 지는 것을 우선하는 협동이 필요한 규범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새마을 운동은 당시 시대에 큰 공명을 불러 일으켰고 과도 많았지만 성공적으로 조국근대화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세대는 보릿고개 넘던 과거세대와 비교가 않되는 경제적인 풍요와 도시화 산업화의 급격한 여파로의 저출산 하에서의 핵가족화를 겪으며 내가 성장했을 때의 빈곤과 절약이 동기로 인식되며 ‘내 아이만은 풍요롭게 키워야지’다짐에 다짐을 하며 가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또한 삼촌, 고모, 큰형, 누나, 대가족하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한을 자기들의 자녀에게 보상받으려는 태도로 양육을 했다. 더욱이 이들은 한 명 내지 두 명의 자녀만 낳았다.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성장했나? 식당에 가서 식탁을 마구 뛰어다녀도 내 아이는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존재이니까 관대하였다.
냅킨을 마구 뽑아버려도 허허 웃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돈을 뺏고 때려도 ‘한 대려니 괜찮아’ 그랬다. 그저 내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이런 아이들이 2000년대 들어와 소위 막가파식 아이들로 성장했다. 나만 알고 나만의 즐거움과 편함이 정의보다 우선했다. 그러니 그런 녀석들이 군에 들어가서 명령, 질서, 체계에 어떻게 적응하겠는가? 욕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옷 벗기고 군내에서만이 아니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아마도 이들이 사회의 기성으로 성장할 때 어쩌면 더욱 가공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세대를 가정의 유형으로 분류하면 익애형가정이라고 부른다. 과잉보호가 특징이고 애정과잉상태로 과성장이 아닌 비성장되고 있다. 임상 상담에서 과잉보호아동을 분류할 때 세 가지를 기준으로 삼는데 첫째 선택권 위임의 정도 둘째책임부여의 정도 셋째 자기 정체성인식의 적합성이다. 현대 교육의 문제 역시 이러한 기준에서 제고해야 한다. 제한된 지면상 충분히 분석할 수 는 없지만 김동민 일병은 이런 세 가지 문제를 공유한 과잉보호 아동을 성장했고 지금도 대인관계는 아동수준의 성인아이일 것이다.
특히 전자의 유형과는 달리 세 번째의 문제가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아이들은 이러한 성장 경로를 갖는다. 귀여움만 받고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되는데 “너는 천재야!” “훌륭해” “걔들이 문제지 네가 옳은 거야” 이러한 부모의 과신 속에서 또래집단이 사회가 인정하는 자기와 부모로부터 주입된 자기정체감의 괴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현실의 세계에서는 멀어지고 자기만의 상상을 즐기며 가상의 세계에서 거부한 사회에 대하여 비록 게임이고 가상이긴 하지만 가공할 폭력을 휘두르며 만족한다. 그리고 골방에서 오후 3시쯤 일어나 라면을 먹고 또 다시 자기만이 자기의 증오감을 키우며 사냥을 나간다. 이들의 무대가 진짜 총 칼을 준 군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칭찬과 사랑도 독이 될 수 있다. 한 두 자녀 특히 외동아들을 갖은 집이라면 명심할 일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고귀한 젊음을 희생하고 상처입고 소모한 것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군대의 제도와 체제 안에도 분명 결함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라는 결함이 있는 하드웨어 안에 정품 소프트웨어가 사용되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총기난사사건의 유가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면서 교사로 간절히 당부한다면 아이들이 귀여울수록 진리를 가르쳐라 어떤 경우에도 왜곡될 수 없다는 진리가 있다는 그 사실을 가르쳐라! 권위를 가르쳐라. 삶을 살면서 마땅히 순종해야할 권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라! 또한 책임과 봉사를 가르쳐라! 화장할 때의 거울은 유리와 수은으로 되었지만 사회가 나를 보는 거울은 책임과 봉사로 되어 있음을 가르쳐라!
과잉보호는 점진적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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