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허봉규 씨
허 봉 규 씨
동향면 자산리 하노마을 출신
한양라이온스354-A지역
제35대회장 역임
로얄·커튼 대표
재경동향면향우회장 역임
현대공인중개사 대표
재경진안군민회자문위원


하노(下蘆)마을 뒷산 큰 소나무 밑에 샘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음력 정월이 되면 이곳에서 산제를 모셨다. 마을 입구에는 한기의 탑도 있었는데 정월이 되면 마을의 부녀자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탑제도 지냈다. 마을 앞 큰 바위에서는 가끔씩 날이 가물어 농사가 어려울 때는 돼지를 잡아 바위에 피를 뿌리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것은 비가 와서 바위의 피를 씻겨달라는 의미라고 마을 어른들은 말했다.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로 마을 숲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숲이 없어지면 마을이 폐촌이 된다하고 오래 전부터 전해 와서 마을 어른들은 이 숲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었다. 지금은 뒷산의 소나무도 없어졌고 산신제도 언제부터인가 없어졌지만 허봉규씨 또래의 주민들이 코흘리개 시절 추억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는 마을의 큰 풍속도들이였다고 허봉규씨는 기억하고 있다. 하노마을은 '갈미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줄기에서 '두억봉' 못미처에 위치한 산세가 마치 화로와 같다 하여 '노산(蘆山)'이라고도 불리며 그 이전에는 '뒤뜰'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고 허봉규씨는 어렵게 기억하고 있었다.

허봉규씨는 1946년 유난히도 추웠던 그 해 겨울 아버지 허성열씨(몰)와 어머니 안봉길여사(몰)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동향초등학교와 안천중학교를 차례로 졸업하고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보감을 차례로 통독하면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당시 집안형편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끼니걱정은 하지 않을 만큼은 살고 있었다고 허봉규씨는 회고한다.

그러나 날이 지나면서 달이 지나면서 그의 가슴에 일고 있는 번뇌와 방황의 그림자를 그는 이겨낼 수가 없었단다. 사월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서 가까운 암자에 드나들다가 그는 운명을 생각한다. 운명 앞에 서서 자신을 보게 된다. 석가여래의 숨은 그림자를 그가 본 것이다. 석가여래는 그랬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하고 말했다.

허봉규씨는 방황하던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세월을 그 속에서 이렇게 찾는다. 진안읍내 병원에 취업하고 6개월, 그는 과감하게 그것을 청산하고 달랑 빈손으로 집을 나선다. 그의 운명론은 논리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어떤 전능의 힘이 인사(人事)의 일체를 지배한다는 사고(思考)로 정리되고 있었다. 이렇게 그는 운명적 가출로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서의 한의원 수습시절, 부산에서의 병원 행정업무 시절을 거쳐서 그는 몇 가지 더 인생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세상을 배회하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다.
필자가 만난 허봉규씨는 참으로 마음속에 여러 가지 정리된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성적 수줍음을 갖고 있었으며 자기의 주장을 먼저 내 밀지 못하고 조금씩 가슴을 열어 자신의 의견을 지켜가는 사람 이였다. 그는 한번 맺은 인연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항상 미련을 가슴에 안고 사는 웃음은 많았으나 이외로 외로운 그런 사람 이였다.

그가 귀향하여 고향에서 인삼경작에 심혈을 쏟으면서 가업(家業)을 이어가는 농부의 모양으로 살아가던 그 시절이 어쩌면 그에게는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의 험로(險路)에서 가장 풍파(風波)없는 좋은 날 이였다고 행복하게 회고한다.
새마을지도자에 임명되어 농촌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배워 농민들에게 전수하고 익혀가던 일들이, 엽연초조합 감사에 뽑혀서는 농촌의 농외소득(農外所得) 증대에 참여했던 그 일들이 보람으로 그에게 새겨 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농사를 가업으로 생각하는 농민후계자가 늘어나지 않는 현실적 배경과 농사의 소출이 농민들이 어렵게 노력하는 만큼 보다 늘지 않는 것 등, 제도에 관한 배신감도 갖고 있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항상 따라 다니는 괴리(乖離)는 현실과 이상의 반사각(反射角)이다. 어쩌면 그것은 생존하는 인간의 운명일 수도 있다.

허봉규씨 그가 그랬다.
농사를 가업(家業)으로 하고 싶었던 그는 운명의 그어진 행로를 따라서 이번에는 아내 안향숙(동향)씨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한 운명의 사건들이였다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한다. 어쨌든 그는 서울에 가정을 꾸리고 정착한다.
액세서리 가내수공업을 통하여, 수제품 미국 수출을 통하여 10년을 보낸다. 이 나라의 경제상황과 맞물려 건설업이 한창 성황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남대문 시장에 「커튼」제작 판매업체 『로얄·커튼』을 창업한다.
그렇게 강산이 두 번씩 변하는 세월을 보낸다. 모든 운명의 여신들은 그의 편 인양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순조로웠다. 사업은 번창했고 2남2녀의 슬하 아이들도 하나같이 잘 자라 주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다던가.

영국에 유학중이던 과년(過年)한 여식(女息)의 부음(訃音)을 받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의료사고로 사망한 이 사건은 허봉규씨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운명을 제시했다고 그랬다.
딸을 잃고 방황한 3년을 그는 이야기 하면서 그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였다고 회고한다. 우리 인간은 체념을 미덕으로 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 그의 표정은 거의 무념(無念)의 그러한 것 이였다.
우리의 고향사람 허봉규씨

사월이 오면 그는 다시 아지랑이 뭉게뭉게 기어오르는 언덕의 고향 묘역에 앉아서 지나간 일들을 회고할 것이다. 아버지를 그리고 어머니를 불러볼 것이다. 어쩌면 이국(異國)의 하늘에 영혼으로 떠돌고 있을 딸아이의 이름도 눈물 그렁그렁 그렇게 불러 볼 것이다. 몇 억겁이 지나고 세세생생(世世生生)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자고 그렇게 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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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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