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왔었네, 바람처럼 살았어라, 이제 바람처럼 가겠노라

/윤 영 신 재경진안군민회장

 

소설 『인형의 집』에서는 젊은 아내가 가출을 한다. 영화 『가족의 초상』에서는 70대의 노인이 가출을 한다. “나와 공통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들 틈에 꾸어다 놓은 것 같은 나를 발견했다.”면서 노인은 세간을 챙겨 가족 곁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고급스런 노인의 가출에 속한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교회소속의 『노인방』이라는 것들이 있어서 유료 및 무료로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인들은 동료, 친지 노인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산책하며 상당히 차원 높은 고독을 나눌 수 있었다. 공동의 식사, 공동의 오락, 공동의 의료시설 등의 A형 레지당스가 있는가 하면 고독과 소외감을 잊고 제 3의 인생으로 활기를 주는데 주력하는 B형 노인방이 운영되고 있다.
미국은 선시티(태양시)라 하여 직장에서 정년으로 퇴임한 사람들만이 들어가 살수 있는 자조·자활·자치·자위 하며 여생을 살아가는 『노인 자치시』가 있다. 우리나라의 노인방 문화도 질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편에 속하는 시대가 있었다. 2품 이상 벼슬을 하다가 70에 치사(致仕, 정년퇴임)을 하면 드나들었던 상류사회의 노인방 격인 기로소(耆老所)가 있었고 보통 노사랑(老舍廊)이라 일컬어졌던 곳은 대체로 회갑이 지난 노인들이 드나들었던 마을의 양노당 같은 것이 있었다. 노사랑(老舍廊)을 둔 향약(鄕約)을 보면 마을에서 과일이 처음 나오면 반드시『老舍廊』에 바쳐야 하고 생일, 제사, 푸닥거리가 있으면 한상 잘 차려서 노사랑(老舍廊)에 먼저 보내야 하며 마을에서 추렴으로 돼지를 잡으면 그 내장은 노사랑(老舍廊)의 노인들의 몫이였다. 경로경장(敬老敬長)사상의 정신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이제 도시화로 이런 것들이 없어진지는 상당히 오래전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지방자치가 행하여지면서 또한 이 나라에 고령화 시대가 다가오면서 유료?무료의 이러한 시설들이 또는 돈벌이의 수단으로서의 이러한 시설들이 늘어나고는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한 손에 가시 쥐고 /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노인문제, 고령화 시대의 노인문제가 우리의 주위에서 또는 복지국가의 대열에서 턱걸이하는 이 나라의 한 시대가 주목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고도의 정책문제로 제시된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가정윤리의 재정립이 시급한 시점에 와 있고 효제충신(孝悌忠信) 사상의 복원이 인간성 회복의 차원에서 요청되는 이 시대의 가장 큰 화두로 등장하여 있음에 이것들이 복지사회 건설의 맨 밑바닥의 주추로서 매김 지어져 있어야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인생이 항상 진리의 길에서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명덕(明德)이란 효(孝)와 제(悌)와 사랑이라고 옛 성현은 가르쳤고 효의 실천은 언제나 어버이를 공경하고 의식의 봉양을 충분하게 하며 어버이의 병마를 근심하여 성실하게 보살펴야 하며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죽은 뒤의 제사에 잊지 말고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이 나서(生) 늙고(老) 병들어(病) 죽음(死)에 이르는 것은 억겁을 통하여 반추되는 인생의 회전 이였지만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고행(苦行)을 감당하기 위하여 많은 정신적 수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늙음의 고통이 없음의 고통을 동반하여 질병과의 싸움에서 불행을 실감하며 의지할 곳 없는 그 외로움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운명과의 접목을 회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외로움을 이긴다는 것은 인생을 달관하였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인간이 자기 최면 속에서 살아가야 행복한 것인데 모두가 그 최면을 잘 못 인식하여 살았고 불행의 뜻만 되새겨 가면서 고통의 멍에를 벗어 내지 못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앞날을 엮어 반추하면서 무(無)랑 공(空)이랑 허(虛)랑 함께 묻어가야 하겠다.
해질녘 물 빠진 바닷가의 고독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철새처럼 방황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그냥 고해였고 허무였고 혼처럼 흩어진 낙엽 같은 잔영 이였다고 치부하자. 그것은 평생의 방황 같은  것 이였고 고해 같은 것 이였고, 강물처럼 흘러 간 한의 세월 이였다고 망각의 늪 속에 그렇게 묻어 버리자.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배부른 암·수 돼지 두 마리가 교미하며 꿀꿀대는 그 평화를 우리는 읽으면서 살아가자. 그 우둔한 평화의 소리가 부러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거기 태고와 억겁 속에 함께 하는 우리를 발견하면서 살아가자. 그것은 나 자신의 영혼의 외침이고 배반당한 줄 알면서도 분노할 줄 모르는 우둔한 영가임을 원죄처럼 간직하며 잊어가자.
이제 『老人, 그 黃昏의 現場에 서다』의 총론으로 이 글을 마치려하거니와 지면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 각론으로 곳곳에 혼재되어 있는 노인들 고통의 현실을 찾아 나서려고 생각한다. 행정의 현장과 정책입안의 현장에서 고령화 시대 이 고통의 면면들이 참고가 되었으면 기대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려 애쓰는 인생들이 결코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 현실이 인간의 존엄성과 노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차원에서 경애의 윤리 가운데서 실천적 의미가 가장 큰 것이 경로사상이라는 것이 지적되었으면 좋겠다.
황혼은 고목을 연상하고 황혼은 석양을 일컫지만 시대의 현실적 짐꾼들이 노인들 그들 이였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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