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전헌근씨
전 헌 근 씨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 출신
남가좌동건설현장입문
사우디 리아트 삼호주택 건설현장
사우디 주베일 대한전선 건설현장
계성제지 정년퇴직
세마대 오솔휴게소 운영

공자의 수제자(首弟子) 유자(有子)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其爲人也孝弟(기위인야효제)요 而好犯上者(이호범상자)는 鮮矣(선의)니 不好犯上(불호범상)이요 而好作亂者(이호작란자)는 未之有也(미지유야)니라. 君子務本(군자무본)이요 本立而道生(본립이도생)하나니 孝弟也者(효제야자)는 其爲人之本與(기위인지본여)인저" 즉 「효성과 우애가 있는 사람이 윗사람에게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윗사람에게 도리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법을 어기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은 아직 없었다. 군자는 기본이 되는 일에 힘써야 하며 모든 일에 근본이 서야만 도가 생겨난다. 효성과 우애는 바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즉 사람에게 효성과 우애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인자이다. 인자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며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유자(有子)는 인(仁)을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성(孝誠)과 우애(友愛)를 실천함으로서 추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멀리 이천 여 년 전 중국의 어려운 논어의 이야기를 발췌(拔萃)해 가면서까지 글을 이어가는 것은 오늘 소개하려는 우리의 고향사람 전헌근씨의 가계(家系)의 내력과 함께 맞닿아 있는 효성과 우애의 혈육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헌근씨는 천안 전 씨 두평공파 59대손으로 그 아버지 전태성(몰)씨와 어머니 남소제(몰)여사 사이에서 5남6녀 중 차남으로 1953년 6월 백운면 남계리267번지 오정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정마을은 내동산(887m)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줄기 끝자락에 위치한다. 멀리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의 상류가 흐르고 마을은 풍수지리상 '개혈' '소쿠리안' '조개혈'등으로 본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에 한해(旱害)가 심하여 이곳에 와서 우물을 팠는데 신기하게도 맑고 깨끗한 물이 나왔고 다섯 개의 샘이 있어 오정(五井)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의 고향마을 오정마을 어귀에서 우리는【松?處士全公奉鎬夫婦孝行碑文】이라고 비표(碑表)가 적혀있는 비석(碑石) 하나를 볼 수가 있다. 여기 적힌〔全公奉鎬夫婦〕가 오늘 소개하는 우리의 고향사람 전헌근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시라고 전헌근씨가 알려준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면 사무소의 호적계장과 진안향교의 전교로 계시면서 일요학교를 운영하시고 한문선생님으로 활동하시면서 그 아버지의 살아생전 할아버지, 할머니의 효행비 건립을 숙원사업으로 여기시고 동분서주하시던 모습을 전헌근씨는 지금 그의 형님도 타계하신 이 시점에서 집안의 중심에서 추억으로 추모하고 있었다.
여기 진안문화백과사전(진안군과 진안문화원 펴냄)에 소개되어 있는 전헌근씨 할아버지, 할머니의 공덕을 기리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추억하는 전헌근씨의 마음을 함께 여기 옮겨 그의 가계(家系)의 자랑으로 삼는다.

효는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의 근본이라/성현께서도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라고 가르치는 까닭이네/한 고을에 하나도 어려우나 한 집안에 둘이 있었네/어두운 밤에 등촉이요 사람을 경계하는 우렛소리이니 일세의 본 보기일세/살아서 섬김이 동소남과 같았고. 상을 당하매 뜻이 연(連)형제와 같았네/황하수가 언제 맑아질까 하늘에 묻고 싶네.
 
5남6녀의 대가족이 한집에 어울리는 전헌근씨의 집안 형편은 원래부터 그렇게 넉넉한 가계(家計)는 아니었다고 그는 어린 시절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반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도우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뒤 늦게 생긴 백운야간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그의 나이 20세가 되면서였다.
시골에서 야간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그에게 달라진 것은 없었단다. 오늘의 현실이 심히 불확실하고 앞날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1976년 봄이 밝기가 무섭게 그는 고향을 떠난다. 달랑 서울 가는 기차 값만 마련하고 서울역에 내린 그는 온몸에 감싸오는 차가운 서울 바람에 자신이 갑자기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무서운 생각이 들더란다. 삶과 인생에 대한 나이답지 않은 수많은 생각이 그를 어른스럽게 만들었고 객지라는 의미가 그를 달구고 있었다.

남가좌동에 둥지를 틀고 노동현장에서 일 년여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을 때 중동바람이 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아트 삼호주택 건설현장에서 1년을 보낸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대한전선 건설현장에서 내친김에 다시 1년을 보낸다.
70-80년대 이 나라 노동 근로자들이 이 나라의 경제성장의 밑거름으로 있을 때 그도 거기 있었음을 그는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귀국하여 국내 건설현장에서 이녀여의 세월을 보내고 1982년12월 최인례(56.임실)여사와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다. 1985년에는 계성제지오산공장에 취업하여 2007년 정년퇴임하고 수원-오산간 국도변 세마대 오솔휴게소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전헌근씨와 대화하는 90분 동안 필자가 깨달은 것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논리성 보다는 모험성 기질이나 그 정신이 어쩌면 돋보인다는 것이다. 달관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모르는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나 부정 보다는 긍정을 그리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적극적 대처가 그의 좋은 점으로 보였다.
 
우리의 고향사람 전헌근 씨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뜻이 꺾이고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었음을 그가 보았다고 그랬다. 지철심경(志鐵心鏡)이라던가? 의지는 쇠같이 마음은 거울같이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도 했다. 그가 할 일을 다 하고 다음에 하늘의 뜻을 기다리고 싶다고 했다.
전헌근씨는 선대(先代)께서 유훈(遺訓)으로 남기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의 길을 가고 싶어 한다고 그랬다.
그는 슬하의 두 아이에게는 이렇게 전한다고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미움도 네게서 나고 예쁨도 네게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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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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