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 야간 보충수업, 4000쪽 분량의 문제집, 상품권, 시도교육청 평가, 학교 성과금, 시나공(시험에 나오는 것만 공부), 시포아(시험포기아동)…"
2011학년도 일제고사(국가 수준 학업성취도평가)가 끝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행어들이다.
187명의 응시 거부자와 적어도 두 곳 이상의 학교에서 교사와 학부모들의 결의에 따라 집단으로 시험을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학생들을 전국적인 경쟁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일제고사의 광풍에서 진안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ㅈ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한 어린이는 "일제고사 때문에 매일 문제집을 풀었어요. 다른 과목 시간에도 시험 준비하느라 문제집만 풀고 그랬어요. 제 생각에는 문제집 푸는 게 공부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은데......" 라며 일제고사로 인한 피로감과 성적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학교와 교사들을 꼬집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인터뷰한 학생은 그나마 공부를 잘 하는 축에 들어 문제집 푸는 것 외에 따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적었을 테지만 공부를 못해 학교의 평균점수를 깎아먹는(?)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고운 시선을 받기가 어렵다. 실제로 시험을 대비한 방과 후 학습 등으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학생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일제고사는 이명박 정부 교육 정책의 핵심이다. 일제고사가 부정시비에 시달리고 보충수업 등으로 학생인권침해 논란에 휩싸이더라도 평가결과를 통한 지배방식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과부는 작년부터 일제고사 점수로 시도교육청을 평가했고, 올해부터는 학교평가에도 반영을 한다. 학교별로는 아직 기준도 발표되지 않았지만, 작년과 비교해 일제고사 향상도를 정보공시하게 되어있다. 이는 학교성과급으로 이어져 교사들의 성과급에도 영향을 주게 되므로, 결국 일제고사 점수로 시도교육청, 학교, 교사를 모두 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 탓에 일제고사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 활발해 지면서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교육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이런 일제고사는 그대로 둬선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대안을 마련해 최소한 학생 인권탄압이라는 오명은 씻어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장권호 전교조 정책실장은 "일제고사와 같은 시험형태로 초중고 학생을 줄 세우기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면서 "학업성취도평가의 당초 취지대로 국가는 표집평가를 통해 정책방향을 연구하고 가르친 자가 평가하는 교사별 평가를 통해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평가방식이 합리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적이 좋지 않거나 학습에 열의가 없는 아이들을 잘 살펴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부모가 제 역할을 못해주거나 주위 환경이 좋지 않거나 하는 가정·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다양한 학습부진의 원인은 외면한 채 열패감만을 부추기는 시험을 통한 서열매기기로 어떻게 학습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건지 교육당국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영·수 중심의 2009개정 교육과정으로 학교별로, 학기마다 과목이 달라 전학가면 중복해서 배우거나 아예 못 배우는 과목이 발생하기도 한다. 매 학기 체육을 하지 않고 3~5개 학기로 몰아서 하는 중학교가 전국적으로 424개다. 과목별 수업시간 20% 증감에 따라 영어 수학 시간은 늘어나고 비입시 과목은 줄어들고 있다. 학교가 입시학원이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고사는 그야말로 타는 불에 기름을 끼엊는 형국이 되고 있다.
 
◆불의 앞에 <분노>하던지 <자발적 복종>을 하던지
언론인 홍세화씨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무심을 넘어선 분노와 참여라고 지적하면서, 한국에서도 각성한 시민의 역할을 강조했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내놓는 참아주기 힘든 나쁜 정책들에 대해 깨어있는 시민이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

홍세화씨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파인 진보의 게으르고 소극적인 모습을 질타하면서 이들이 더 집요하고 더 적극적일 때 비로소 한국 사회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강조했던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현실을 전복하는 창조적인 저항은 바로 이런 참여 속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사, 학교를 줄 세우는 결과 이외에 어떤 가치도 차기 힘든 일제고사에 한국 사회가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홍세화씨는 "바로 경쟁 이외에는, 그래서 너도나도 다 불행해지는 방법 외에는 다른 해법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고사가 생산해 내는 가치가 불안에 내 몰린 학부모와 학생들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선뜻 폐기되지 못하는 이유는 학부모를 비롯한 국민들의 무관심이 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에티엔 드 라보에티는 몽테뉴와 동시대에 살았던 16세기의 지식인이다. 그는 <자발적 복종>에서 이렇게 묻는다. '폭군이 등장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시민의 '자발적 복종'이야말로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권력이 요구하는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부당한 억압-피억압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발적 복종'으로 부당한 구조가 유지되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참된 자유인의 탄생은 불가능하다는 게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성찰이었다.

교단에 선 교사들이 먼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배수의 진을 치고 잘못된 교육정책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을 자격이 없는 시정잡배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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