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왔었네, 바람처럼 살았어라, 이제 바람처럼 가겠노라.

/윤 영 신 재경진안군민회장

 

인간이 늙어가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 갖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그것에 대한 동경이 함께 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일 뿐이라고 어느 노인이 말씀하셨다. 노인의 개념이 몇 살부터인지는 시대에 따라서 그 분류의 원칙이 달라져 왔었으니 우리는 여기서 노인의 개념에 대하여는 논외로 하자.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지켰고 늙은 백발이 되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
어떤 이유로든지 노인들이 사회와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지나간 젊은 세월을 국가와 사회와 가정과 자식들을 위하여 바쳐 온 그들의 공로가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늙어 힘이 없어지니 쉬어야 한다는 발상은 그들 노인들에게는 정신적 고려장 같은 이야기이다.
15세에 배움에 뜻하고 30세에 서고 40세에 惑(혹)하지 아니하고 50세에 天命(천명)을 알고 60세에 耳順(이순)하고, 70세에는 마음대로 하고 싶은 바를 쫓되 법규를 넘지 않는다(爲政)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어느 유망하다는 정치인은 그랬다.
『60대 이상 70대는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 그 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
법규에 대하여 마음대로 하고 싶은 참정권의 권리나 의무를 포기하라는 의미였는가. 아니었겠지만 그의 말대로 자신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노인들은 무척 섭섭해 했고 한 번 삐진 노심(老心)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물f j있어야 했었다.
四代가 한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도 화목한 가정을 일구어 나가는 어느 李氏-家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아흔 을 넘기신 할머니 밑에 아버지 내외와 자신의 부부 그리고 밑으로 요즘 세상으로는 불가사의 할 만큼 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李氏내외는 항상 만나도 만날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의 소시민으로 우체국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그는 불평스러운 표정이란 한 점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장수하시는 할머니와 노부모를 모시는데 일종의 긍지조차 갖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를 만나면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행복한 분위기에 함께 젖을 수밖에 없노라고 주위의 친구들도 칭송이 자자하다. 그렇게 되니 전국적으로 흩어져 제각기 살아가고 있는 李氏의 형제자매들도 자연히 우애의 정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고 그랬다. 李氏의 말 자체는 그의 형제들은 그것이 곧 법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덕(德)이었다. 덕(德)의 승리였다.
며칠 전 77세의 할머니가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는 일간지의 기사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였다. 10여 년 전 남편과 헤어진 그 할머니는 많은 재산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이 그 할머니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을 결심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우선 가정의 붕괴였다. 가족의 갈등이었고 주위의 무관심과 주위로부터의 소외 등 그 할머니의 정신적 위기감이 경제적 충족보다 더 크게 할머니의 마음에 그늘로 다가왔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유산상속문제 등으로 자식들간의 불화를 보면서 유산을 넘보는 자식들의 갈등을 보면서 그리고 그 자식들과의 의사소통에서 대화의 단절에서 또는 형제들과의 상호 불신과 거기에서 오는 증오에서 할머니는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법한 일이다.
동기(同氣)로 세 몸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夕陽) 문외(門外)에 한숨겨워 하노라.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는 그러한 가정이 지탱되었다면 그렇게 가정 해체의 아픔이 이 할머니에게 없었다면 아이들과 함께 가난해도 행복한 평생을 마쳤을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방송프로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어서 많은 비난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런 패륜적인 행태가 비록 실제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공영방송에 내놓은 그 사람들의(작가, PD 등 방송 관계자) 심사가 참 두렵다.
필자가 알고 있는 어릴 적 친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의 나이가 이제 60대 중반이니 그가 노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람처럼 살아 온 그의 평생을 듣고 어쩌면 그의 바람처럼 살아 온 일생이 이 시대를 살아 온 그 또래의 우리들의 그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든다.
아버지적 집안이 워낙 어려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는 상급하교 진학을 꿈에서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1950년대 인삼 보퉁이를 짊어지고 행상에 나서 전국을 누볐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밥벌이는 되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당시 집안의 형편이거나 자신의 처지가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어림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아내가 한없이 고맙고 커 보인단다. 여기까지가 40여전 20대에 마령장터 5일장에서 만나서 그에게 푸념처럼 들었던 사연이었다. 그래도 그 때 그는 덕천리의 농원에 자리 잡고 아이들 몇도 두었다고 자랑했었다. 한번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거론하며 원망하는 기색 없이 그날이 돌아가신 선친의 기일이여서 제숫거리를 장보려 왔노라고 그랬다. 그로부터 40여년을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가 청첩을 전해왔다. 그의 둘째 아들이었고 예식은 남산 야외예식장이라 하였다. 그날 우리들은 낭만적이고 시적으로 커 온 그 애의 예식에서 지나간 40년의 그림자를 읽었고 바람처럼 살아 온 그의 풍상을 만났다. 필자가 마령면의 그의 농가를 방문한 것도 그날이 우연이었겠지만 그의 회갑이었다. 아이들과 며느리와 사위들과 그 밑의 손자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즐거워하는 그의 어린애 같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악동처럼 여학생들에게 짓궂게 굴어 쌓던 그의 반세기 전의 「실루엣」이 떠올라 왈칵 눈물을 쏟은 적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행복이 별 것이냐. 이것이 행복 아니겠냐?』
그렇다.
그는 뛰어난 부자가 아니라도 그는 내노라하는 엘리트가 아니라도 젊어 어려웠을 적 자신의 방황을 막아주고 따라 준 그의 고마운 아내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바친다고 그랬다. 그리고 별 탈없이 자연처럼 자라나서 자수성가의 길에 자신의 뒤를 이어주는 아이들이 고맙다고 그랬다. 욕심이 없다고도 그랬다. 사심도 없다고도 그랬다. 바람따라 바람처럼 떠돌던 그 젊은 행상시절이 그리워 때로는 훌쩍 정취야 소시적 그 맛은 아니지만 5일장을 고향을 찾아가 듯 그렇게 찾아본다고 했다.
그들 내외의 행복의 근원이 된 그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보내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준다면 초고령화 시대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담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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