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던 고향의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송 정 진 씨
마령면 강정리 원강정 출신
패션몰 『U:US』 대표
재경진안군민회 체육담당이사

 

“자신이 가장 잘 하고 높은 곳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곳이 상대방의 발끝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이른 아침 7시에 새벽 강의를 들으면서 또는 회사 일이 끝나고 야간 강의를 들으면서 하루를 촘촘하게 살아가면서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철학이 그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었기 때문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낙엽이 발등을 덮어가는 나무 밑에 누어서 얕아지는 가을하늘을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 다 보면서 계곡의 작은 물 흐름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더 쓸쓸한 그런 계절이다. 그가 그 답지 않은 이런 망중한에 빠져드는 것도 한가함을 즐기거나 휴식을 즐기려는 그것이 아니고 오로지 내일에의 도전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송 정진.  1962년 9월 23일생. 마흔 네 살의 그 년륜이 길다고 생각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이 참 어려운 그것이였다고 송 정진, 그는 그렇게 회고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가난한 농촌마을 , 허기진 배속과 생활고, 그리고 바깥세상을, 여기보다 더 넓고 더 큰 한고 같은 곳이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그 세상을 향하는 동경하는 마음, 이런 것들에 밀려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도 꼴 베러 나가야 했고, 또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지게를 짊어지고 오르내렸던 뒷동산의 산 길목들, 그 모질고도 추억어린 고향을 등지고 떠날 것을 그가 결심한 것이 그의 나이 아직 약관의 열아홉 적 이였단다.   6남매(3남3녀)의 다섯째였던 그는 그렇게 꿈을 쫓아서 낯설고 물 설은 서울 땅에 상륙한다. 그는 우선 상경의 명분을 주경야독에 둔다. 「대화전기」에 취업하여 생활의 터를 마련하고 영등포의 시립도서관에서, 그리고 시간을 쪼개서 기술학원에 등록을 마친다. 세월과의 싸움은 자신의 인내와의 경쟁이기도 하였다. 사춘기를 반납하고 살아 온 그의 인생에서 영화관 한번, 들놀이 한번 제대로 즐겨보지 못하고 지내 온 청춘의·시절들이 어쩌면 자신에게는 한편의 드라마였던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처음 검정고시를 염두에 갖고 시작한 학원입문은 열관리, 원동기, 냉난방등의 네 개의 자격증을 소지하는 억척을 보였고 그 결실은 오늘의 자신을 간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단다. 전주와 광주, 그리고 목포, 이렇게 수많은 크고 작은 도시를 주유하기 십 몇 년, 「C.F라인」 「원앤드원」 「i.몰」등 많은 송 정진씨 소유의 「의류로드 샵」들이 도처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패션산업은 부가가치가 높은 도시형 산업으로 불립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일찌감치 패션 산업에 눈을 돌려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1987년 처음 그는 중량교 인근에 보증금 3천만 원, 월세80만원의 점포 한 칸과 숙식용 삭을 세 방 하나로 서울에 입성하여 사업자금 전무상태의 그가 오늘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용기, 패기, 신용과 믿음이라는 그의 철학을 그가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 이였던 것 같았다.   동대문시장은 조선조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래 서울의 대표적 상권으로서, 1990년대 이후 청계천6가를 중심으로 한 의류, 섬유, 신발 등의 재래시장을 통칭한다. 송 정진씨의 시선이 미치는 곳은 이 쪽의 도매시장 쪽 이였다. 우수한 인력과 원 자재 등을 확보하고 디자인 개발, 그리고 상인들의 도전정신 등이 조화를 이룬다면 그가 지금껏 시선을 멈추고 구상해 온 현재의 사업추진이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님을 그는 힘주어 역설한다.
이제 그는 세계 패션 계를 향하여 손짓하며 세계로 간다.
패션 몰 「유어스」를 통하여 (지하6층 지상5층: 연20,321.60평규모) 판매및영업장을, 업무및문화,집회시설,서울패션디자인센터와 패션쇼 공연장도 계획하고 있다.  그의 어렸을 적 소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집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아 준다거나 자신을 챙겨주는 그런 지극히 소박한 것 이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소박한 소망은 그야말로 바램 이였을 뿐이고 항상 부엌 차례는 누나의 몫 이였고 누나가 차려주는 저녁을 마친 후에야 부모님들은 들일을 늦게 마치고 겨우 돌아오시고는 하는 게 고작인 일과였지만 그래도 집안형편은 항상 어려웠고 여섯 남매의 부양도 부모님들은 항상 힘겨운 듯 느껴졌다.
「동네 아이들이 맛있다고 자랑해 쌓는 그 자장면을 저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먹어 보았습니다.」
뭉클 하는 그의 가슴의 응어리가 보이는 듯 싶더니 금방 방울지는 눈시울을 감추면서 창밖을 본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나무 가지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반가운 소식이 오려는가. 하늘이 참 맑다.
송 정진 씨. 그가 갖고 있는 애틋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것이지만 이제 그가 겨우 효도 할 수 있겠다고 깨달았을 때 그의 곁을 떠나가신 부모님에 대한 정말 서러운 연민으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아버지의 간병에 지쳐 쓰러지신 어머니,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자식으로서의 한계와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함께 가슴에 안고 그리움은 그냥 자신의 업보로서 간직한다.
“for you and for us”
“U:US (유어스) ;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 당신과 함께 발전하는 우리.
산골짜기 두메산골의 소년 송 정진이 이제 세계로 간다. 일찍이 사춘기를 생활에 반납하고 먹고 싶은 자장면을 참으면서 살아 온 그가 이제 세계를 향하여 손짓을 한다.  「유어스」를 외치면서 세계를 향하여 달려간다.
서러웠던 어머니의 추억을, 가난했어도 아름다웠던 고향의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이제 그는 고향을 갈 것이다. 진안고원 마령평야를 향하여 고향 들녘에 피어나는 야생초의 곁으로 그는 갈 것이다.
(H.P. :011-269-6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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