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령면 덕천리 신덕출신재경마령면향우회 총무 및 재경 진안군민회 섭외이사 역임재경진안군민회 부회장1939년생이니까 이제 인생의 수 많은 이별의 구비구비마다 그는 박목월 시인의 이별가에 소줏잔을 앞에 놓고 이승 아니면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너의 뼛가루를 강에 흘려 보내는 나는 그처럼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놓인듯 하다. 너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이제 부질없이 날아가 버리는 구나.”이병준씨는 가끔씩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 보낼때마다 이제 세월의 덧없음에 서러워질 때가 많아진다는 것도 그것도 인생무상을 느낄 때마다 지나간 자신의 세월을 짚어보기도 한단다.이병준씨. 그는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수 있는 그런 정(情)의 사람이었다.마령초등학교와 마령중학교를 졸업한 17세의 소년 이병준씨는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한다. 청량리의 어느 한 약국 한의사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우선 자신의 길이 어느것인가를 가늠하는 그 시간시간들이 외로움과 함께 닥쳐오는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의 절망감에서 그렇게, 또는 부롯치 공장에서의 그러한 일년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병준씨는 오직 마음에 제 아무리 좋은 가식도 진실을 능가할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굳혀갔다.정직하게 살자. 근면하게 일하자. 성실하게 살아가자. 지극히 교과서적인 이러한 교훈이 이미 이병준씨의 어린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교훈도 이제 고희의 길에 가깝게 들어선 지금까지도 그것은 이병준씨의 좌우명으로 자리잡고 있단다.이병준씨가 이별에 남다르게 약한것도 그 작은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인간적인 뇌세포는 어쩌면 또 다른 이별을 두려워하면서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태고적 하나의 설움이 별똥별 되어 이땅의 적막한 벌판에 찾아 온 유성이 어쩌면 나인지도 모르겠다”이병준씨 그와의 대화는 항상 한없이 난해하다. 그것은 행상으로 서울 생활에 익숙하려 노력하였던 그시절의 그의 모든것이 그로하여금 난해한 대화의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는 생각이 든다.2남1녀중의 장남으로서의 넉넉하지 않았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하고 1965년 6월 제대이후의 그의 또 달라진 것은 그가 이번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재상경한다.이번에는 이웃마을의 송민자씨와 결혼하여 쌀 다섯가마를 빚내어 들고서였다. 처음 리어카 행상을 시작한다. 공사장의 기장 보조로서 다음에는 인연의 갈밭을 건너는 바람과도 같이 어떤 장애도 극복하고 서로를 연결하여 주노라는 박목월시인의 그것처럼 이병준씨는 모든 인연을 그렇게 엮어간다.그는 정인(情人)은 될지언정 낭만에 익숙하지 못하였다.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병준씨에게 어쩌면 낭만이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대로는 혼자서 세상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영국 속담에서 배워온 ‘오늘 할일은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는 지극히 격언적이고 속담적인 이러한 용어에 익숙하다보니 가슴에 인간적인 낭만이 머물러 있을 자리가 없었다. 때로는 외로웠고 때로는 적막했다.그는 철저하게 무신론자 였으나 때로는 혼자 앉아서 묵상하는 그 시간 자신에게 다가서는 우주만물의 속삭임을 들은 것이었다. 인간이 내게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있었지만 아직 자신은 그 이별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존경하는 이가 있는가 물었다. 존경하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그는 마령중학교 설립자인 전태주 선생을 그렇게 느낀다고 했다. 그것은 그분이 그 학교를 세우지 아니하였으면 자신과 같은 많은 마령인근의 사람들이 외국어를 터득할 수 있었으며 중학교의 문턱이나 넘어보았겠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그 학교로 인하여 배출된 인재가 몇몇이냐는 논리였다.좋아하는 꽃은 향기가 있는 꽃이면 모두 좋지만 야생화, 특히 그중에도 들국화같은 꽃이 좋다고 했다. 매마른 들녘에 늦가을까지 서리를 함초롱이 맞으면서 서 있는 들국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이 그속에 모두 숨겨져 있음을 본다고 했다.이러한 그가 1970년 빚을 얻고 또 ‘리스’를 활용하고 그의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주식회사 서경산업을 창업한다.한 약국의 한의사 보조역과 부롯치 공장의 공원으로 쇼빵, 냉차, 아이스크림, 과일의 행사에서 시작하여 공사장 미장보조에서 스티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까지 섭렵하기 반세기를 이병준씨는 그 현장에서 그와 꼭 같은 모든 서민들과 함께 보냈다.지금 이병준씨의 얼굴에 그려진 주름살은 50년대 검정고무신을 신고 완행열차를 훔쳐타고 또는 80년대 청운의 꿈을 안고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의 가슴엔들 왜 낭만이 없겠는가. 그라서 어찌 표정없는 외로움이 그의 것이기를 바라겠는가. 그가 지금 진안고향에 다가간다. 우리 앞에 다가선다.이병준씨도 마인산을 바라보며 향수를 읽을 줄 알고 용담호에 앉아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한다.그는 말한다.“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그렇게 살고싶다.”고./H.P 011-783-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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