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호 진솔대안학교 교장

 얼마 전 종례를 늦게 끝내 준다는 이유로 중3학생이 선생님을 짓밟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후 곧이어 충북의 어느 초등학교는 급식지도에 다소 강압적인 언사가 있었다는 이유로 학부모들이 떼로 몰려가 급기야 교사가 학부모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사태가 일어났다.

 

 심지어 익산에서는 스승의 날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학생을 체벌하자 그 장면을 공개하며 집단 반발하는 사태까지 비쳐지는 교육현장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사건화가 안 되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비일비재한 일이라는 것이다. 원인은 학교에서의 교사는 더 이상 권위가 없다. 학생역시도 학교에서는 더 이상 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것 같다. 학교 현장에서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학생, 학부모, 교사의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지?, 해결 방법은 없는지 답답하다.

교육에는 3주체가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 주체란 학생, 학부모,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교육이 되려면 이 3주체가 서로 조화롭고 유기적으로 균형을 이루어가며 서로 협조하고 공동목표를 이루어가야만 하는데, 불행이도 지금의 교육현실은 이 균형이 다 깨어져서 마치 눈사태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형국이 되어 버렸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교육계가 진보주의적인 교육자들의 주도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하여 2000년에는 전국이 그 교육 사조로 중무장하기에 이르렀다. 짧은 지면에 이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루쏘, 존 듀이 같은 이들의 주창으로 형성된 이러한 사상은 여러 고상한 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실수는 옳고 그름의 교육의 본질적인 측면간과하고, 좋고 싫음으로 오해하였고 미래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과 공헌을 망각하고, 아동중심주의가 지나쳐 명확한 목표설정에 실패하기 쉽고, 흥미, 적성위주의 접근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가르치고 배워야할 당위적인 교육의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열린 교육”  “눈높이 교육”  “맞춤형 교육”이런 말들이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전술한 것처럼 부정적인 부분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알아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비꼬기도 한다. “열림교육 너무 열려다 찢어져 버렸다고......”

 

거기에다가 70년대를 거치며 성장했던 십대들이 학부모 연령층을 이루면서 학부모 이기주의라고 밖에 표현 못할 “내 아이 기 않 죽이기” “내 못 받은 것 내 아이에게는 해주기”의 보상심리와 설상가상으로 전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관료화된 교직사회의 문제, 공도 많았지만  교육적인 측면에서 과도 무시할 수 없는 전교조와 비 전교조간의 갈등에서 오는 교사 권위의 실추 문제등의 교육의 총체적인 난맥을 이루면서 우리나라의 교실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아이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총체적 난맥 가운데에서 근본으로 돌아가 보기를 제안한다. 교육이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명심해야 한다. 어떤 명문을 가지고도 이 두 주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내 아이, 내 제자가 죽음을 명심해야한다. 학교는 누가 지키는가? 학생인가? 학부모인가? 교사인가? 학교에서 누가 누구에게 가르치는가? 학생이 선생에게 가르치는가?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치는가? 아니면 학생이 교사에게 가르치는가? 이도저도 아니면 학부모가 교사와 학생을 가르치는가? 이 자명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교육의 3주체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마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축은 교사이어야 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미국의 아동중심의 교육과정이 현재 가장 비효율적인 미국교육의 참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 크다고 하겠다. 1990년대 미국에서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가 동생이 운다는 이유로 20층 베란다에서 던져 버리고 배실 배실 웃는가하면, 13살 아이는 지나가는 행인의 운동화가 탐난다고 45구경을 뒤에서 발사 현장에서 사살하는가 하면, 중간고사를 마친 어느 고교생은 AK-47소총을 들고 교실을 난입하여 선생님과 급우를 사살했다.

 

어느 특정한 예가 아니고 1984년부터 1994년 10년 동안 미국 인구의 14%에 불과한 18세 이하 청소년들이 전체 중범죄의 58%,전체 폭력사건의 40%,전체 절도사건의 50%이상을 저지르고 17세 이하 아동에 의한 살인사건이 300%증가하고 2005년에는 전체 살인사건의 25%를 차지하고 있음이 무엇을 역설하고 있는가? 이는 미국의 교육 핵심에 학생중심구조의 교육관과 아동중심의 학부모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이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님도 우리가 알아야 된다. 현재 우리의 교실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지난 10여 년간 무분별하게 아이들을 우우 떠받들고 자유라는 사탕만을 잔뜩 안겨주었던 우리의 잘못에 있다.

 

어느 교사는 교실붕괴의 현장에 교사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교사는 교실에서 쫓겨난지 오래 되었으니까, 다만 아이들의 시체만 즐비하게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어떤 교육적인 갈등도 정책적 실패도 그 화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실붕괴를 막으려면 교육의 3주체 중 가장 중심축인 교사를 교실 한 복판에 우리의 학부모들이 먼저 세워주자는 것이다. 간혹 부족한 교사들이 있을 지라도 결코 아이들 앞에서는 선생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 (이이들이 알 필요가 없는 교육 외적인 문제는 현재 우리의 시스템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규범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규범을 행하는 모범(역할모형)이기에 교권을 우리 부모들이 지켜주자. 교사에 대한 권위를 우리들이 확보해주어야지만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권위를 가르치지 않겠는가?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했다. 눈앞의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자녀의 내일을 희생시키는 일 이 없이 자녀 앞에서 당당하고 단호해야 한다. 받들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성경은 창세기 39장2절을 통해 교육의 진정한 지혜를 주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 ”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이 함께하신데 형통한데, 고작 주인집 노예라니? 이집트의  총리로 사용하실 때, 지도자로 교육하실 때 진짜 필요한 것은 노예로  삼으실지라도 받드는 교육을 시키신 것 아니신가? 창세기39장의 중! 심축은 누구인지 누가 그 위임을 받았는지? 오늘 우리가 다시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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