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나는 잊지 못한다

임 종 신씨

정천면 갈용리 농산마을 출신

대성입시학원(광주캠퍼스) 원장

재경진안군민히 참여부회장


앞만 보면서 달려간다. 생활과 자신의 꿈만 향해서 끝없이 뛰어가던 어느날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땀을 씻어내고 있었던 그 시간 갑자기 느껴지는 자신의 무거워진 위치가 자신에게 낯설어지고 주위의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80년대 신경림 시인의 그 중얼거림을 그는 중요한 메시지로 받는다.

‘나의 마음은 불타고 있다’ 그래서 열정과 지식의 발달을 꽃말로 간직하고 있는 ‘사루비아’를 좋아하는 청년. 1960년 3월생이니까 금년 46세의 청년 임종신이 그다.

 

정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동중학교와 전주상고를 마치고 숭실대 회계학과에 유학하여 고려대학원 경영학과에서 수학하였다. 4남5녀 중의 일곱번째의 임종신씨는 부모 덕에 어린시절의 생활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었다고 회고한다. 정작 그의 마음이 커오면서 느껴 오던 현실사회에 대한 그런 것이였던 것 같다. 같은 동기들간의 경쟁이거나 흔히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했던 그 사회에 대한 그의 마음의 갈등이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발전하여 떠나가는 동기들을 보내면서 직장 내에서 경쟁하며 그렇게 서로의 포부와 꿈을 지키면서 동아일보 재정국 회계과에서 임종신씨 그는 그의 강산이 한번 변하는 세월을 보낸다.

새로운 발전에 도전하는 젊은 의지에는 현실은 항상 불만투성일 수 밖에 없는 것. 그래서 사회는 그들의 정열에 의하여 끊임없이 발전하여 가는 것이다. 임종신 그도 그랬다.

 

뜻한 바 있어 동아일보를 떠나서 학교재단 진성학원에 발탁되어 총무부장 5년을 거쳐 대성학원 총무이사에 스카웃 된다. 10년간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의 능력은 주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러 CEO로서의 오늘 임종신을 우리가 지켜보게 된다.

 

정부당국의 잦은 정책변경으로 학원계의 어려움이 항상 상존하는 현재의 상황과 예지학원의 화재로 인한 해당 업계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그의 상기된 표정에는 자신만만함을 잃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때로는 하루를 보내고 뒤돌아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상실감이 허탈해진 권태감 속에 빠져드는 자신의 나태를 깨달으면서 처절한 삶에 대한 도전으로 그것들을 이겨낸다. 섬뜩하게 스쳐가는 지난 시절의 면면들을 감당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그는 그의 가슴 속에 새겨 넣는 정신적인 자세를 항상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가슴에 파고드는 향수를 온 생활에 대입시켜 생활이 풍부하고 전설이 살아 있는 고향의 흙 냄새를 그는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자칫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 또래의 고향사랑을 항상 간직하기 위하여 임종신씨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가끔씩 꺼내들고 탐독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구한말 음울한 민족의 수난기에 격동과 혼란의 세월 속에서 인간의 음모와 복수와 그리고 상실감 속에서도 자기의 의지를 꿋꿋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주인공 젊은 서희와 길상의 모습을 그는 잊지 못한다.

 

때때로 수몰되어 간 고향의 댐 위에 서서 묻어져간 인간의 향수를 생각하며 그 산하에 흩어져간 많고 많은 고향사람들의 애환의 이야기들을 그는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처절하고 아픈 그 삶의 현장에서도 그는 쉬지않고 고향의 이야기들에 동참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이었다.

(☎ 011-304-0869)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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