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희 주 (정천면 봉학리)

1,200도가 넘어선 가마에서 쏟아지는 주홍빛 불길이 태양을 닮았다. 후끈하고 강렬하다. 그 가마 앞에서 우리 조상들처럼 술 한잔으로 의식을 대신해본다.

벌거숭이 아이들처럼 주물러 댔던 가마속 내 첫작품들이(?) 자못 궁금해진다.


삶이 시시해 지고 매사가 위태한 걸음걸이를 닮아갈 때 먼저 참석하셨던 분들의 권유로 도예교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시골이나 마찬가지로 여가선용의 기회가 적은 곳에서, 특히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선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활력이 필요할 때, 목요일 저녁은 나를 기쁘게도 설레게도 하면서 첫사랑 떨리는 가슴으로 다가왔다.


처음 만져보았던 흙의 감촉!

피부에서 감각의 뇌까지 도달할때의 그 벅참과 경이로움. 무에서 유를 창조하게된 내 손은 목요일 저녁엔 엄숙해진다. 덩달아 내 정신도 깨어난다.

간단한 저녁 식사 시간도 아깝다. 우리들 열성에, 자상한 유선생님 지도도 자정을 훨씬 넘기게 된다. 늦도록 보내지 않은 서운함에 부인께서 팀명을 ‘도.미.노’라고 지어주시는 바람에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도예에 미친 노장들)


찻잔이 빚어지고 접시가 모양을 잡게되고, 항아리가 내손에서 산고를 겪으며 태어난다. 그토록 열망했으나, 언감생심 꿈도 못꿨던 소망하나를 풀게 됐다. 꿈꿀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하지만 꿈의 성취는 더욱 값지고 오지다. 하고 싶은 일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을 행복이다. 기쁨이 조금씩 따뜻한 불길을 담기 시작했으므로 가마속같이 나를 녹여내는 불길이 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깊은 고통 속에서 얻어내는 연단된 기쁨을 차지하고 싶다.


지금 나에게, 흙은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가장 진실한 자세로 있는 흙. 흙은 나에게 또 하나의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백토사용법, 상감기법, 도자기의 역사 등을 사이사이 가르쳐주시는 유선생님이 산처럼 듬직해 보인다. 흙으로 거칠어진 큰 손이 흙을 빚어낼 땐 엄숙하고 진지하시다. 손길 또한 너무 섬세해서 절로 탄성을 짓게 한다. 물론 존경심은 자동으로 따라온다.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도 내 복이지 싶다. 또한 목요일 팀의 분위기도 시세말로 끝내준다. 흙과 스승과 내 자신, 완벽한 삼위일체가 되었다.


오랜시간을 흙과 있진 않았어도 흙을 만지면 가슴 깊은 구석에서 교감되는 것이 있다. 첫사랑과 비슷한...

도예를 하면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 정성을 쏟은 만큼 흙 또한 나에게 그 정성만큼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 표현은 새로운 각오와 신선한 계획을 세우게 하고, 나를 주저앉지 못하게 한다. 끊임없이 열망에 젖게 한다.

창작하는 자세는 언제나 진지해야 된다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미완성이 완성으로 이어져 하나의 작품이 되고, 애착을 넘어서 다음 것에 대한 절제를 배우게 된다. 그동안 늪같이 나를 끌어들였던, 공허함과 시간 죽이기, 무료한 나날들이여~ 이젠 안녕.


차츰 내 분신들로 하나, 둘 내 자리로 들어와 말 없이 말해주는 내 창작물들.

손으로 하는 일은 치매도 예방한다 했으니, 선생님의 에너지를 열심히 전수 받아야 몸과 마음이 넉넉한 노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양양한 내 노후가 든든해 진다.(?)


도예가들이 본다면 허점투성이며, 콧등을 낄수도 있겠지만 그런들 어쪄랴. 그들도 처음엔 열정만 무한대인 나와 같은 부류였으리라.

세상에 나로 의해 태어나진 내 손의 자식들을 보며 또 하나의 손가락이 되어버린 흙의 얼굴을 마주본다.

기적이나 바라면서 환상 속에 그림자로 살았던 자신을 양지로 밀어내며, 불꽃같은 강렬한 인생하나를 꿈꿔본다.

자잘한 소망의 조각들이 모여 이룬 작은 기적들, 이러한 순간들은 삶을 빛나게 한다. 앞으로 어떤 인생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는지 누가 알랴.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해준, 어린시절 간절함으로 끝나버렸을 꿈 하나에 날개와 또 하나의 꿈을 꾸게 해주신 유선생님과 정다운 정천식구들에게 큰 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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