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박문관 계남정미소 김지연 사진작가

어린시절, 우리들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양쪽 의자 발걸이에 걸쳐진 판자 하나는 작은 앉은키를 대신해 준 훌륭한 도구가 되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 간판과 처마 밑에 내 걸린 하얀 수건들은 코흘리개 아이들의 좋은 구경거리였다.

 

불과 수년 전의 일이다.

철지난 두꺼운 여성잡지를 뒤적이며 낄낄대던 까까머리 학생들의 모습에서부터, 투박한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하얀 비누거품에 턱을 내어준 동네 아저씨의 모습도 볼 수 있었던 이발소의 풍경들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월을 따라 사라져갔다.

 

올해 53살의 사진작가 김지연씨.

그녀는 이런 일상의 변화를 사각의 프레임에 담아냈다.

점점 그 모습을 잃어가는 우리들의 일상은 그녀의 사각 프레임을 통해 다시 기록되기 시작했다.


늦은 입문···


그녀가 카메라를 손에 들은 것은 40을 훌쩍 넘긴 10년 전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 서울예술전문대학에서는 연극을 전공한 그였지만 처음 손에 쥔 카메라는 여전히 낮 설었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주부로 살아오면서 그림에 대해서는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었요.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이 카메라로 옮겨지게 된 것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아요. 뒤늦게 사진을 배우게 됐고, 또 전문적으로 사진을 배운 사람들의 기술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죠.”

 

어린시절 할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따라나섰던 정미소의 풍경이 그녀의 가슴속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일까? 오랜 고민 끝에 그녀가 처음 사각의 프레임에 담은 것은 바로 정미소였다.

7, 8년 동안 그녀는 전국 곳곳의 정미소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사각 프레임에 담긴 일상의 풍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미소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가을걷이가 끝난 후 그럭저럭 움직이던 전국의 정미소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5년 전 고철파동이 났을 때는 그나마 있던 정미소들이 흔적조차 사라졌죠.”

그때부터 그녀가 한 장, 두 장 담아둔 정미소 풍경은 작은 공동체를 이끌어갔던 소통의 공간으로서, 농촌지역의 작은 역사가 되어 버렸다.


공동체박물관으로 변한 정미소


그녀에게 있어 정미소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다 쓰러져가기 직전의 방앗간 모습과 여러 색깔의 함석을 누더기처럼 기운 겉모습, 그리고 모두다 도시로 떠난 농촌을 지키는 장승처럼 정미소 곁에 서 있는 작은 전봇대 하나까지 그녀의 사진속에 담긴 정미소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었지만 그녀는 여기에 ‘소통’의 의미까지 부여했다.

“옛날 우리의 정미소는 마을주민들을 연대하는 소통의 통로였어요.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정미소를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속에서 사라져만 가던 정미소의 의미가 그녀의 손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정미소를 또 다시 마을 공동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던 공간으로 지켜가지 위해 그녀는 올해 5월, 마령면 계서리 계남마을에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비소(인터넷 홈페이지 : http://www.jungmiso.net)'를 만들었다.

 

그녀의 손을 거치면서 1년을 넘게 폐허처럼 자리 잡았던 작은 정미소는 이제 주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사라져가는 정미소를 ‘문화공간’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그녀의 구상은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작은 마을에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어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주민들이 함께 참여한다는 데서 그 의미가 있죠.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웰빙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진정한 웰빙이 될 수 있죠. 농촌에서 물질적 기쁨과 함께 정신적 기쁨까지 얻는다면 도시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주민과의 소통을 꿈꾸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 얼굴들이 한 없이 선량하다. 고왔던 옛 모습은 간데 없지만 할아버지의 손을 슬쩍 부여잡으며 무척이나 수줍어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주민과의 소통은 그렇게 시작했다.

친구들이 어깨에 맨 나무가마를 타고 떠들썩하니 골목을 지나고 있는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 단발머리에 흰저고리를 입은 새침한 표정의 동네 아가씨들, 마이산 탑사로 소풍을 간 까까머리 남학생들, 그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여행길에 나선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지역에 둥지를 틀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살아있는 사진을 만들어 가겠다는 그녀의 각오처럼 지난 5월20일부터 9월20일까지 열린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개관전은 계남마을 주민들의 낡은 앨범을 뒤적여 잊혀진 옛 이야기들을 끌어냈다.

“외롭고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때때로 지치고, 때때로 힘들기도 했구요. 철저히 발품을 팔아 주민들을 찾아 다녔지요. 그 결과 도시로 나간 출향인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마음의 안식을, 마을 어른신들은 추억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옛 것에 대한 배움을 얻게됐습니다. 점점 칼라화 되어가는 세상을 따라 점점 낡은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도 사라져가고 있어요. 빨리 수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다시 주민속으로


주민들과 소통의 물꼬를 튼 그녀가 이번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주민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제는 옛 사진뿐 아니라 지역의 아름답고 소중한 현재의 문화들을 지역 주민과 함께 사각의 사진틀 속에 담으려한다.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사진강좌가 바로 그것이다.

“주민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가지고 함께 ‘전시회’를 갖는 꿈을 꿔 봅니다. 특별한 사진기술을 갖고 찍은 사진이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은 그런 사진들을 갖고 전시회를 해 볼 생각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정미소의 색다른 공간에서 주민과 소통은 이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가 추구하는, 아니 김지연 작가와 주민들이 꿈꾸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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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두 번째 기획전

마이산으로 가다

 


지난 5월 20일 김지연 작가는 지역의 둥지를 틀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살아있는 사진을 만들어 가겠다는 각오처럼 계남마을 사람들이 낡은 앨범을 뒤적여 잊혀진 이야기들을 끌어내는 개관전을 열었다. 이날 개관전에는 친구들이 어깨에 맨 나무가마를 타고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사진 오른쪽)과 단발머리에 흰 저고리를 입은 새침한 표정의 동네 아가씨들(사진 가운데),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혼례장면(사진 왼쪽) 등 잊혀진 옛 이야기들을 끌어냈다.

주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대표 김지연)가 ‘마이산’을 주제로 두 번째 기획전을 갖는다.

오는 14일부터 내년 1월14일까지 3개월 동안 마령면 계서리 계남정미소에서 열리게 되는 이번 기획전은 마이산 소풍, 처녀 총각들의 데이트 모습, 계 모임, 일가친척과의 나들이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이산을 배경으로 한 주민들의 추억을 담았다.

김지연 대표는 “이번에 전시될 사진들은 대부분 흑백사진으로 1970년대에 찍은 사진들이다”라며 “당시 사진들은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게 되고, 월남전 이후 카메라의 보급도 늘면서 이전의 결혼사진, 회갑사진 등 기념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함과 재미를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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