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신 <재경진안군민회장>

“백주에 강도가 나타나고 어두운 밤에 도둑이 있다고 합니다만, 좋은 얼굴을 한 큰 도적이 조정에 가득하여 국사를 어지럽히니 신하는 강도가 되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어 바햐흐로 도탄에 빠져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근심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밝고 신하가 곧으면 만사를 다 도모할 수 있는데... 이러고서 조선강산의 종묘사직을 어찌 보전할 수가 있으리까. 윗물을 휘저어 놓으면 아랫물이 정갈하지 않는 법이온데 어떻게 남은 운수를 바라오리까. 지금 형용(形容)이 걸·주가 기름 기둥에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보다 더 심하옵니다.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법이 어느 임금 때에도 없었던 변고 이옵고... 직임(職任)을 사고파는 탐관오리가 백성의 기름을 빨고, 좌수(座首)아전이 나라곡식을 훔쳐 먹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것만 같은 글귀의 문맥이지만 이글은 1846년 평양 용천기생 초월이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의 일절이다. 당시의 벼슬 값이 감사는 5~6만금이요, 수령은 큰 고을이면 적어도 6~7천금을 먼저 바치고 난 연후에라야 망(望)에 올라 부임할 수 있었다니 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지나간 5.31선거 때의(민선4기) 의원과 단체장의 3414개의 선거구에서 생겼던 편법과 관행의 불투명한 사건들과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면서 민심이 도저히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없었던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 그 크고 작은 고을들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그들이 쏟아냈던 공약들을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영합하려는 그들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어쩌면 그 사자후 같던 음성들이 채 귓전에서 살아지기도 전에 잊고 마는 그 지도자적 몰염치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실험하고 있었던 직접 민주주의와 풀뿌리 민주주의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직접민주제는 지방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단계적으로 지역의 특성에 맞게 적용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노파심이다. 크고 작은 지방의 단체장들이거나 의원들이 중앙정치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민들에게 알맞은 정책을 입안하는 노력보다는 그들마저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들거나 집짓기 경쟁 같은 정책에만 의존하여 예산낭비의 표본으로 경쟁적 인기 명합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의 지표를 얻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도저히 아니라는 권위주의적인 그들의 발상은 아직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백년정당을 표방하고 나섰던 그들의 오늘날 행태를 지켜보면서 우리 민중들의 불행이 언제까지 지고가야 할 업보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더 슬퍼지는 것이다.

 

정당 활동은 민주주의 근간이다. 크거나 작거나 조직의 테두리는 지켜져야 하고 그 테두리의 약속은 배반되지 않아야한다.

경선에서 지고도 불복하여 또 다른 테두리를 찾아나서는 그 안하무인은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으니 나 데리고 가라는 식의 갈팡질팡 정치인, 이때도 총리하고 저때도 총리하고 자리만 보장된다면 또 하겠다고 나서는 몰염치 그들, 대통령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는 정당들의 난무, 50년 정치사에 16대 대통령까지 만들어지고 흩어져간 정당들의 숫자는 몇몇인가.

지금 또 이 나라에 정치의 계절이 오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창당이다, 통합신당이다 아니다하고 떡 줄 민심은 냉랭한데 그들 김치 국물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차라리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이합집산이 아니다. 정계개편이니 하는 그 언어들이 개인 개인 그 지도자인체하는 그들이 원하는 지역회귀음모이거나 정권연장의 획책이거나 그것이 정당정치의 파괴이거나 퇴보이거나간에 명분 없는 자기들만의 다툼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위치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를 재단하는 단선적인 논리는 위험하며 역사적 사실을 도덕성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다만, 크고 작은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하는 지도자 무리에게 우리가 요구하고 싶은 최소한이 간절한 의문은 있다.

“그들에게 국가관은 있는가. 그들의 영혼 속에 민족관은 간직하고 있는가. 국가경영에 대한 경륜은 있는가. 조국을 사랑하는가. 민족을 사랑하는가.”

둘러보고 뒤져봐도 만족한 대답은 없다. 출사표를 던져온 그들의 면면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칩거하는 지도자는 건방지기 짝이 없다. 외유하는 지도자는 다시 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배반하는 지도자는 싹을 자르자.

 

거짓말하는 지도자는 다시 믿지 말아야 한다. 연기하는 지도자는 더욱 삶으며 초청정치인, 대리정치인은 이제 그만 휴식 년에 보내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우리 민중의 긍지와 자존심을 찾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매끈한 정치인보다는 어눌한 정치가 차라리 우리가 찾아나서는 방법인 것은 매끈함의 과잉은 연출된 스토리의 그것처럼 우리를 식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함께 고민하며 조그마한 흔적이지만 역사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길 수 있는 지도자를 찾아서 나서자.

우리가 비록 부자들에게 혐오감으로 남아있는 90% 민중이라 하더라도 무관심과 복수심이 아닌 용서와 화해의 민중으로서 생존권을 찾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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