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면 무릉리 서상진·박선진 부부의 세상이야기

빠르게 변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귀농’이란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더욱이 그 곳이 ‘고향’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단지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고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 둘씩 욕심을 버림으로써 정신적인 행복함을 느끼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려는 이들에게 농촌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셈이다.

귀농의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빡빡한 도시를 떠나, 정이 넘치고 언제든지 땀 흘린 자에게 먹을거리를 줄 수 있는 자연으로 돌아가리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흙을 다시 살리는 것도 사람이고, 황폐화된 시골을 다시 가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진실을 실천하는 의미 있는 선택이 바로 ‘귀농’인 것이다.

그들 또한 화려한 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고 농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귀농’이란 단어는 사치일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주천면 무릉리 산기슭에 새 터를 잡은 서상진(52)·박선진(56) 부부의 삶 속으로 들어가 봤다.

 

마주치는 것들이 모두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있어서인지 모든 것이 신선했다.

붉은 벽돌을 가지런히 쌓은 외벽이 그랬고, 한 무더기의 짚을 덮고 있는 조그만 텃밭도 그랬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한 줄기 빛을 포갠 채 살포시 깔린 밤안개를 머금고 쉼 없이 달려가는 야트막한 산 능선을 뒤로 한 채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광목천으로 운치를 더한 커튼사이로 비치는 산속 눈 풍경이 정겹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그들이 녹아 있었다.


난 이방인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는 과연 무엇일까?

혈연, 지연, 그리고 학연.

거대한 사회적 틀 속에서 강요당하는 이 같은 고정된 사고와 행동은 결코 무뎌질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서상진씨에게 있어서 거대한 사회적 틀은 헤어 나올 수 없는 큰 벽이었다.

그리고 수업료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흔한 초등학교 졸업장마저도 받지 못한 그를 사회는 ‘이방인’으로 규정지었다.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을 없을 겁니다.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 뛰어들기 위해 200통의 이력서를 써 봤지만 어느 곳에서도 평가받지 못했지요. ‘문교부 증’이 없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죠.”

그런 그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동’이었다.

하지만 ‘노동’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그 사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물찾기의 시작

“어린시절, 우리는 잡지를 보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뒤통수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같은 책을 보는데도 말입니다. 서점을 가보세요. 책꽂이에 꽂힌 책들은 상품가치를 인정받지만 잡지는 서로 포개진 채 진열됩니다. 이런 잡지를 보면서 ‘나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측은한 맘이 생겼습니다.”

20살을 채 넘기지 않았던 시기였다.

독학을 위해 찾았던 허름한 한 헌책방 처마 밑에서 한 권의 잡지를 사면서 그의 보물찾기는 시작됐다.



[소년] : 1908년 11월 최남선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로, 1911년 5월 통권 23호로 종간되었다. 최남선이 일본 유학중이던 1906년 학생모의국회의 토의안건이 문제가 되어 조선인 학생 70여 명이 동맹·퇴학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최남선이 남은 학비로 인쇄기구를 구입하여 귀국한 뒤 이 잡지를 간행하였다. 이 잡지는 근대적 형식을 갖춘 잡지로는 한국 최초이며,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신체시의 효시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대조선독립협회회보] : 1896년 11월 30일 창간된 독립협회 기관지. 순국문·국한문혼용체·한문을 병용한 국내에서 발간한 최초의 잡지이다. 국정 전반에 걸친 논설을 게재하여 협회의 애국애민의 뜻을 널리 폈다. 1897년 8월 15일 제18호로 종간됐다.

[창조] :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로 알려진 잡지. 1919년 2월 1일에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문학가들에 의해 도쿄에서 창간되었다. '동인지'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지어서 만든 책으로 기획 ·집필 ·편집발행까지 하는 문학잡지를 말하며 ‘창조’의 창간동인은 김동인·주요한·전영택·김환·최승만 등 5명이다. 1921년 5월 통권 제9호로 종간되었다.


한 권, 두 권 그의 보물찾기는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세상속에서 대우받지 못했던 한을 그는 잡지를 통해 발산했고, 잡지에 대한 열정은 그의 서고를 ‘소년’,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창조’ 등 역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잡지를 비롯해 1만 여 권의 잡지들로 가득 채워나갔다.

그의 서고가 잡지로 가득 채워지면 질수록 그는 또 다시 시골로 눈을 돌려야 했다.

잡지가 많아지는 만큼 관리를 위해 방을 늘려야 했지만 터무니없이 높아져만 가는 도시의 방값은 그가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가 시골을 택한 두 번째 이유다.



우연한 만남

늘 혼자였던 그가, 천생 배필인 박선진씨를 만난 것은 94년이었다.

10여년이 지났지만 박선진씨는 서상진씨와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이가 94년, 충남 당진에서 잡지전시회를 열 때였어요. 당시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저는 회원들과 전시회장에서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요. ‘풀하고 씨름하느라고 한 여름 다갔다’는 얘기에 이이가 대뜸 ‘내버려 두지 풀을 왜 뽑습니까?’라고 물어오더라구요. 그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신은 마당에 풀을 키운다고. 풀숲으로 변한 마당에서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 ‘내 집에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타이른다’는 얘기도 했지요. 참 별종이란 생각을 했어요. 그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1년이 지난 뒤 헌 책방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더라구요.”

일상을 버리고, 그를 찾아 떠난 그녀의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둘은 만났고, 행복한 모금자리를 꾸며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전국주부백일장’ 산문부 장원, 화승그릅이 주최한 ‘장천문예상’ 일반부 가작, ‘전주일보 소설부문 신춘문예 당선’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며 소설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에게 이곳은 자연과 함께 잊혀졌던 꿈을 이루어가는 공간일 것이다.


잡지, 세상과의 공유를 꿈꾸며

15년 전이다.

그는 당당히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했다.

장수군에서 10년을 산 그가 2002년 주천면 무릉리 강촌마을 뒤 산기슭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붉은 벽돌로 예쁜 집도 새로 지었다.

도시를 떠나 시골을 선택했지만 그는 여전히 집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집을 짓는 업자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단순히 품삯을 받고 일을 할 뿐이란다.

업자가 되면 당연히 이익을 남기게 되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남을 속이게 된다는 것이 그가 업자이기를 거부하는 이유다.

“돈을 번다는 것, 또 돈을 쓴다는 것 모두 자유를 구속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덜 벌고, 덜 쓰게 되면 더 많은 자유를 남길 수 있죠.”

도시를 떠나 농촌을 선택한 그의 행복지수는 현재 ‘최상’이다.

욕심을 버리고 농촌을 선택한 그였지만 그에게도 작은 욕심이 생겼다.

바로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잡지를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욕심이다.

“내 것을 자랑하다는 의미보다 이제, 개인이 갖고 있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모은 평생의 성과물이 세상 사람들과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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