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난이 이젠 인생의 좌표가 되어…

정 장 용 씨정천면 모정리 출신(주)동화기영 대표경주정씨 중앙종친회 부회장재경정천면 향우회장 역임재경진안군민회 자문위원정천면 망화리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모정리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고향을 망화리로 치부하며 살아온지 70여평생. 정장용씨는 1935년 1월 3일생 경주정씨 양경공파 20대손으로 경주정씨 중앙종친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리고 일찍 재경정천면향우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그쪽의 대부임은 자타가 인정한다.정천면이 고향이면서 자신의 출신학교가 용담쪽으로 고향의 이중성으로 때로는 즐거운 비명을 경험하는 예도 있다고 술회한다. 필자가 정장용씨와 함께 10여년을 교유하면서 느껴온 것은 노익장과 앞서가는 애향심이거나 또는 모교에 관한 애정은 그것이 곧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종종 깨달으면서 그것이 곧 자신의 갖고 있는 모든것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그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작은 충정도 있음을 느끼곤 하였다. 정장용씨, 그는 또한 낭만과 정열의 사나이 같았다. 조그마한 아니면 자신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어쩌면 모험같은 그의 사랑이야기 한토막. 중년쯤이던가, 정쟝용씨는 기억을 고의로같이 흐렸다. 남도향 부산의 어느여인을 사랑한적이 있었단다. 어느때는 비행기를 이용하여 부산과 김포를 넘나들며 그 여인네와의 사랑을 불태우다 못해 자신의 모든것을 포기하며 현재의 부인과의 이별을 제안한다. 여필종부라던가, 그의 부인은 당시 상당하리만큼 많았던 정장용씨의 재산과의 바꿈을 거절하고 그와의 이별을 거부한다. 정장용씨 담배 한대를 불붙여 연기를 뿜으며 자신의 추억에 잠긴다. 그러한 부인의 당시의 행동에 대하여 정다운 여인의 향기와 존경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한번도 내색하지 못한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 한다. 공개해도 좋겠느냐고 필자가 묻는다. “상처였겠지. 그러나 슬기로운 우리네 여인들의 모습을 아내에게서 보면서도 당시 부산으로 향하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지. 남자는 여자가 지키는거야” 공개해도 좋다는 것 같았다.낭만의 이 사나이 정장용씨의 열흘간 빨치산 이야기로 그의 평생의 두가지 큰 사건중의 하나였던 이야기를 바꾼다. “민족의 비극이었지. 6·25이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후방의 빨치산 활동이 극성을 부리던 그 시절 끌려갔지”10대의 가장 나이 어린 정장용씨는 ‘싸릿골’ 빨치산의 은거지에 끌려간다. 당시의 연령이 그렇겠으나 낭만의 사내 정장용씨는 공산주의와 ‘막스·레닌’ 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같은 것은 사실 마음속에 품고 있었단다. 그러나 정장용씨가 빨치산의 현장에서 지켜본 공산주의의 모순은 그리고 인간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타락현장은 그의 마음속에 동경으로 잠자고 있었던 사사의 색채를 바꾸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싸릿골’의 탈출은 자신의 일생에 큰 획의 설정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정장용씨는 지금 70의 연륜에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에 심취되어 몇독의 읽음으로 밤을 새운다. “태백산맥은 내 이야기여, 내가 썼어야 하는데 그런거여” 지금 자본주의의 값어치에 만족을 느끼는 그였지만 어쩌면 어린시절 ‘싸릿골’의 열흘간의 그에게 상당히 큰 충격과 그의 긴 인생에서 상당히 큰 몫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안의 2남3녀중 막내인 정장용씨는 ‘분텃골’ 무당의 한마디가 자신의 평생에 끼쳐준 횡포에 대하여도 이제 황혼의 지금 당당하다. 아주 어린시절 가끔씩 밤중에 부모님의 다투시는 사건들이 그의 일생에 끼친 영향을 정장용씨는 운명처럼 받아드린다. “막내가 안됐지만 어쩔것이여. 그놈은 많이 배우면 집안에 흉사를 저지를 놈이여” “당골레 따위가 무얼 안다고. 그래도 가르쳐야지”장수 어딘가 분터골의 용한 무당이 있어 그의 아버지에게 막내는 무식해야 집안이 편안하다는 점괘를 던져 주었단다. 당시 일찍 깨인 대전이 본가이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정장용씨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던져진 어쩌면 신의 저주였거나 자신의 운명이려니 그렇게 정장용씨는 그것을 피하여 자신의 낭만과의 접목으로 그것을 대체한 것 같다고 웃는다. 그의 학력의 전부는 당시 집안의 형편과는 관계없이 용담초등학교의 졸업으로 마감한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그가 깨닫고 순응하는데는 그의 많은 인내가 필요한 것이었단다.어느시절 호남지역에서는 말뚝만 꽂아놔도 당선될 수 있었다는 그 세월. 고향에서의 국회의원 출마를 종용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정치자금과는 관계없이 정장용씨는 일언지하에 그것을 거절한다.“김두환씨 이후 무식한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었지”정장용씨의 소주잔에 담겨진 허탈한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연령 20세에 자신의 무식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인한 그 무식을 한 할수만 없었던 그는 군에 입대하고 제대하는 동안 그의 형은 학부를 마치고 서울에 정착하는 착실한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정장용씨는 형님의 그늘을 찾아서 서울에 정착한다. “서울은 내겐 낯선 땅이 아니여. 누나가 서울에 출가하여 있었으므로 가끔씩 서울엔 들렸지”정장용씨는 용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1, 2, 3등안에 들어야만 학교에서 원서를 써 준다는 그야말로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응시할 수 있었다는 관립 교통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다. “그것은 운명인게야. 분텃골 무당의 예언이 맞는 갑다고 생각했어” 정장용씨는 고등고시에 도전하여야겠다는 결심으로 수년간을 보통고시준비에 정진한다. “소학교 학력밖에 아니지만 지금 내가 간직한 이 실력들은 모두가 그때 익힌것들이여”정장용씨는 무신론자이지만 신의 뜻에 순응하고자 마음먹는다. 형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주)동화기영을 창업하고 자신의 집안이거나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어느날 밤 부모님의 자신에 대한 대화를 마음에 새긴다. 그것이 미신이건 아니건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이제 인간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는 떳떳한 그 길이 어디 있는가를 찾는다. 고향이거나 정천면 향우회거나 진안군민회거나 그가 보내는 마음은 그의 인생 전 과정을 통하여 각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부산 어느 여인과 분터골의 무당과 싸릿골에서 있었던 정장용씨의 이야기들이 한 인간의 운명에 끼쳐주는 역할을 우리는 읽었다.가끔씩 정장용씨는 김삿갓의 일생을 그리고 대원군 이하응의 행적을 생각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것이 생각하는 행동이 앞서간다는 것을 정장용씨는 강조한다.조국이, 고향이, 또는 자기의 소속사회가 부모가, 형제가, 친구가 자신의 곁에 있어 좋은일로 궂은일로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을 정장용씨는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접수한다. 망화리가 고향이면 어떻고 모정리가 고향이며 어쪄랴. 용담초등학교 출신이면 어떻고 정천초등학교 졸업생이면 어쩌랴. 오늘도 정장용씨는 그냥 자기의 길을 간다. 용담호를 내려다보며 망향대에 앉아서 그때 선뜻 작별을 거부했었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으로, 하마터면 빨치산의 일원으로 지리산 아니면 운장산 어느 계곡의 원촌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자신의 몸둥이로 이제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수 많은 빨치산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고집하는 그이지만 이제 이 민족의 좌표의 설정을 하나임을 정장용씨는 잊지 않는다./H·P : 011-754-7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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