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으로 귀농의 꿈 키우는 천춘진 박사

생명의 시대를 강조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가장 강력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친환경농업’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환경농업 현실은 그 내용에 있어 미약한 것 또한 사실이다. 햅쌀이 익어가는 들녘은 분무기를 타고 쏟아져 나오는 농약으로 가득 채워졌고,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비료 값을 원망하면서도 대다수 농민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화학약품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친환경농업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그 전망이 여전히 불안하고, 나날이 떨어지기만 하는 농산물 가격에 농민들은 지쳐만 갔다.
미약한 환경농업의 현실 속에서 왜 자치단체마다 친환경 농업에 사활을 걸고 지역의 미래를 찾고 있을까? 찾아오는 농촌, 행복한 농촌공동체의 필수조건이 된 친환경농업의 진정한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2004년 3월31일. 1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환경농업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천춘진(36) 박사로부터 그 해답을 얻고자 한다.

나도 이제, 농민이다
정해년, 새해를 맞기도 전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영농조합법인 애농의 대표이기도 한 그가 농협중앙회가 선정한 2006년 12월, ‘이달의 새농민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2004년, 귀농의 꿈을 시작해 불과 3년 만에 이룬 쾌거다.
일본 동경농업대학에서 농학과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경농업대학 미생물 생태학 연구실과 친환경농업자재개발연구소 등에서 학자의 길을 걷고 있어야 할 그였지만, 그는 농민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귀농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일본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한 채 땀 흘려 일하는 농민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12년 동안의 일본 생활
1992년이었다.
전주농고와 천안의 연암축산원예전문대를 졸업한 그는 1992년 4월, 일본의 동경농업대학 연구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전문대 졸업 후 2년 연수과정으로 일본엘 가게 됐죠. 그때에도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맘이 간절했지만 구체적이지 못했고, 조금은 추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연수를 선택하게 됐고, 연수 과정에서 편입학 정보가 있어 동경농업대학으로 편입학 하게 됐습니다.”
좋은 은사를 만났다고 했다.
그 인연의 끈을 이어 1999년에 동경농업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2년에는 동경농업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게 됐다.
그리고 그해 동경농업대학 미생물 생태학연구실 조교로 근무하던 중 그해 7월, 친환경농업자재를 개발하고 연구하는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2004년, 1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귀농을 결심하기까지 2년 동안의 연구소 생활은 그가 농민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일본에서 익힌 근면, 성실, 정직
친환경자재연구소에서 그가 담당했던 업무는 농민들에 대한 컨설팅이었다. 토양과 식물체의 영양분을 비롯해 미생물 등을 검사해 농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농민들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그의 업무였지만 그는 오히려 일본의 농민들에게 더 많은 것을 얻었다.
바로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정직이었다.
“네트멜론이라는 작물이 있습니다. 작물 표면에 가로와 세로의 줄이 생기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온도의 변화에 따라 줄의 굵기가 달라지죠. 그런데 일본의 농민들은 네트멜론 표면에 생기는 줄의 생성과정을 모두 지켜보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을 지켜보면서 멜론의 표면에 줄이 생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일본의 농민들입니다. 좀더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한 일본 농민들의 이런 노력들은 연간 몇 십 억 원씩의 소득을 올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일본 농민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며 그는 “그런 농민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귀농의 꿈을 고향에서
일본에서 그는 2명의 소중한 인연을 잃었다.
함께 귀농을 꿈꾸던 2명의 선배들을 암으로 잃은 그는 그동안 꿈꿔왔던 농촌에서의 삶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쉽지만은 않았다.
박사학위까지 딴 사람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주위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싫었고, 농사에 대한 이론은 있지만 실제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그런 그에게 아내(이복이·33)는 큰 힘이 됐다.
“일본에서의 경력은 모두 잊으세요.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본인이 확신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새싹 씨를 갖고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 2004년 귀농의 꿈을 시작해 4백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됐던 어린 잎 재배 공간은 어느새 2천4백평의 땅에 19연동 하우스로 확장됐다. 9일 그의 하우스에서.
농업의 테마는 ‘친환경’
그가 얘기하는 농업의 테마는 바로 ‘친환경’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친환경 작물은 작은 새싹들이었다.
“토마토, 오이, 쌀까지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친환경작물들은 수확까지의 사이클이 너무 컸습니다. 적게는 수개월 동안, 많게는 1년 동안 솔직하게 농약을 치지 않고 키울 자신이 없었죠. 오랫동안 준비는 해왔어도 확신을 갖고 덤벼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어린잎 채소였습니다. 어린잎은 씨를 뿌리고 단 2주 만에 수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시장조사나 실습 등을 거친 상태여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죠.”
일본에서 가져온 씨를 부귀면의 작은 하우스에서 실험과정을 거쳤고, 바로 400평의 비닐하우스를 임대해 어린잎을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파종부터 영업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뛰었지만 인건비조차 뽑기 힘들었다.
판로가 없었다.
서울지역에서 몇몇 가정에서 이용을 하고 있었지만 어린잎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 부족으로 보급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홈페이지(www.aenong.com)를 만들고, 전주에서의 홍보활동으로 점차 어린잎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졌다.
2005년, 생협과 연결되면서 판매량도 늘었고, 생협 판매는 자연스럽게 어린잎에 대한 홍보로 이어져 서울 쪽 영업도 활발해졌다. 4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됐던 어린잎 재배 공간은 이제 2천400평의 땅에 19연동 하우스로 확장됐다.

또 다른 희망을 꿈꾸며
그는 아직까지도 귀농에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땀 흘려 일하는 농민의 한사람으로서 우리 농촌에 희망을 찾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고 있다.
이런 그의 노력은 귀농을 선택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와도 연관된다.
“애국심이었죠. 12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차갑고도 내려보는 듯한 인상을 많이 느꼈습니다. 결국 내 나라가 잘살아야 한다는 애국심이 싹트게 된 계기가 됐죠. 우리의 농업이 일본보다 앞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농촌에서 좀더 많은 희망을 찾아야 겠죠.”
그는 올해부터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우리의 농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농업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지만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농민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찾아 나서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이제야 비로소, 농민다운 농민이 된 그가, 농촌의 희망을 찾는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 것이다.

어린잎 채소란?
식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야채의 어린순을 말하고 영어로는 베이비리프(baby leaf)라고 합니다. 이 어린 순에는 성장한 야채에 비해 무기질과 비타민 A, B, C 등이 수배에서 수십 배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영양이 풍부한 채소입니다.
애농의 어린잎채소에는 항암초, 브로콜리, 케일, 경수채, 다채, 유채, 겨자채, 비트, 근대, 보리, 소송채, 시금치, 양배추, 들깨, 더덕 등의 기능성 채소를 흙에 직파하여 7가지 이상(종류는 계절에 따라 다릅니다)의 어린잎을 수확하여 혼합하고 있습니다.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대신 쑥, 아카시아, 포도, 으름 등으로 제조한 효소를 사용하고, 농약대신 마늘, 고추 등으로 만든 즙으로 벌레의 증식을 예방 또는 억제하여 재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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