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겨울엔 도서관이나 파먹을까?’(5)

우리는 한달, 아니 일년 동안 과연 몇 권의 책을 읽을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바쁘게 지내는 현대인들에게 책들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하지만 책은 우리의 일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바로 그 ‘맛이 있는’ 일을 찾게 해준다. 놀이공원에 가서 많은 시간 줄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주머니를 축내지 않아도, 조금은 늘어지는 자세로도 하루를 충분히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일들이 책 속에 있다. 올 겨울, 소설가 박선진씨와 함께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 속으로 빠져보자. -편집자 주-


얼마 전, ‘그림 읽어주는 여자’ 라는 책의 대필 파문이 있었다. 이렇게도 그림을 알 수 있겠구나 싶던 책이었는데. 5 년 전 쯤 모 단체의 미술기행을 반년 쯤 함께 했다. 일정에 따라 미술관을 돌고 오는데 하루해가 짧았다. 대개는 서울에 있는 미술관에 갔었고 지금 남아있는 건 가끔 떠오르는 독특한 미술관이나 주변풍경이다. 따라다니면 좀 더 그림을 잘 알 수 있을까 하며 안내자격인 모교수의 이름에 신청했으나 기행은 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날 기어이 “ 감상에 필요한 설명 같은 것 해주지 않나요?“ 는 내 우문은 ‘그저 마음 가는대로 바라보면 된다’ 는 답과 함께 미술관기행을 접게 했다.

그리고 감상은 그저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다고 믿기로 했다. 한 때 우리 모두를 달군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은 미술과는 관련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고. 그랬는데 한마디로 이 책은 이런 나의 우문이 그저 우문이 아니었다고 위로해 주는 것 같다.

“회화, 조각, 건축 등의 시각예술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미지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지에 눈 뜨고, 이미지에 둘러 싸여 있다가 잘 때조차 이미지로 꿈을 꾼다.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들은 모두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지면 가득 활자만 빽빽하던 신문조차도 사진들과 적당한 공간배치로 변해있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미술 역시 종교의 전달수단으로 시작되었다.

지식층만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대중에게 교리를 전달하였다. 거대한 성당이나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세상의 종말’이나 ‘지옥의 심판’ 같은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통치자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품을 제작하였다.

‘피라미드’의 독특한 조형이 태양신과 왕 파라오를 상징적으로 동일시했듯 오늘날의 화폐 또한 그런 통치적 목적의 산물이다. 초대대통령의 초상화가 새겨진 화폐를 쓰던 그 시절의 통치권에 종속된 예술은 이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 자신의 정서와의 감응을 중요시 하지만 때로는 작가의 배경이나 작품의 동기가 된 상황, 작가의 삶이 감상의 안내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뿐 아니라 당시의 관습을 아는 것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특정한 토대를 제공한다. 어떤 관습의 테두리안에서 작업했는지 아는 일은 망망대해에서 해로를 바로 읽는 것과 같다.

관습에 따르면 서양의 신부는 하얀 옷을 입는데 중국은 빨간색을 입는다. 또 서양의 상복은 검은색인데 중국은 하얀색이다. 이런 간단한 관습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서양의 결혼식 사진은 중국의 장례식 사진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느끼는 대로’ 라는 것은 사전지식을 전제로 하는 ‘아는 만큼 보인다’의 귀결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이집트의 그림들을 즐겨보는데 늘 기이하게 느꼈다.

인체의 얼굴은 옆모습인데 반해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고 어깨와 가슴 또한 정면이다. 그런데 발은 또 옆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표현된 신체는 자연스럽지 않고 유기적이지도 않으며 모든 그림들이 입체감이 없이 평면적이라는 점이 궁금했었다.

그. 런. 데 옆얼굴의 정면을 향한 눈은 그 앞의 상형문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자연스럽지 못한 몸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의 신체의 재현이라는 거다. 이집트의 그림은 한 개의 시점에서 바라본 통일된 조형미를 위한 미적 추구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던 것- 관습의 재현과 사후의 관점을 주제로 하기 위해 여러 개의 시점에 따른 원근법이 사용되었고, 영원성의 상징으로 평면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든 작품들의 밑그림에는 격자눈금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술가와 시대가 바뀌어도 작품을 완성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개인적 취향이나 의도는 관습이 요구하는 사항들에 종속되었음을 알려준다.

신화와 성경, 역사를 알지 못하면 감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의 작품들이다.

이후, 이집트의 조각기술을 전해 받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스타일로 발전시켜 고전주의의 이상형을 구사했다. 우리는 이를 ‘다빈치의 인체비례’에서 알 수 있는데 이를 뒤집으려 한 이가 피카소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들은 그런 비례에 길들여진 눈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피카소의 난해한 작품들은 익살의 표현으로 보인다.

 

미술에 취미가 없어도 피카소와 고흐의 이름은 익숙하다. 고흐는 구두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고대의 신발그림은 성지순례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신발은 성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신화에 기초하고 있는 ‘슬리퍼로 살짝’ 이라는 제목의 ‘아프로디테’가 손에 들고 있는 구두부터 ‘프라고나르’의 ‘그네를 타는 여인’의 벌어진 치마아래 기다리고 있는 남자 앞으로 벗겨져 내리는 빨간 샌들은 의심없는 성적인 표현이다.

고흐의 구두그림에서 성을 암시받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고흐가 모델을 살 돈이 없어 주로 노동자의 신발을 그렸다는 것과 어려웠던 그의 삶과 가족사를 알게 되면 그가 그린 구두에서 노동자의 땀냄새를 맡을 수 있다

우리는 거의 전시장에서 작품 감상을 하는데 간과하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원래 이 자리에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작품들은 원래 놓여질 자리까지 의도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대성당이 현대의 고층건물에 가려 왜소해지듯, 멀리 갈 것도 없이 남대문이 고층건물과 자동차에 둘러싸여 위용을 잃어 보이듯이 작품의 위치는 감상자의 시각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다빈치코드’에 나온 ‘암굴의 성모’는 원래 촛불만 밝힌 교회의 어두운 실내에 맞게 제작된 것이고 로마의 산타마리아 성당의 베르니니의 조각은 교회당의 기둥과 벽감, 그 안의 ‘성 테레사의 황홀’이라는 조각과 그것을 감상하는 후원자 가족의 묘사까지 함께 설계된 바 감상자 또한 그 속에 함께 하지 않으면 제대로의 감상이 불가능하다.

내가 2004 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본 ‘대영박물관전’의 경험이 이에 해당할 것 같다.

임시 설치한 어두운 통로를 지나 도록에서 본 적 있는 유명한 유적들의 실물을 보았다. 그건 보았다는 표현이 옳다. 장엄한 역사적 유물 앞에 선 감동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도록이나 사진을 보며 나만의 상상으로 배경을 두르고 느끼던 신비감이나 그리움 같은 게 없었다.

이런 점까지 배려하는 경우가 중국의 진시황분묘라고 한다.

분묘발굴이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자 중국정부는 분묘의 갱 전체를 돔으로 만들어 갱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게 해서, 안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굴작업을 계속하는 현장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는 감상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 요소가 되었다. 공주의 무령왕릉이나 천마총에서도 이런 감동은 가능하다.

백남준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를 계획할 때 작품의 배치를 위한  미학적 맥락으로 구겐하임미술관까지도 작품의 한 부분으로 설계를 고려해 그의 작품인 ‘동시변조’를 정교하면서도 인상적으로 구현했다. 현대 들어서는  도시와 농촌의 자연환경에 설치하는 작업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작품의 환경적 맥락을 고려한 이해의 코드일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정보단위로 묶이면서 미술을 둘러싼 논쟁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위조와 도난사건들은 여전히 흥미를 유발하는 사건이며 대표적인 예가 트로이의 유적인 ‘술레이만의 보물’이다. 불법유출 논쟁속에서 실종되었다가 2차 대전 후 모스크바박물관에서 발견되어 대중의 공개와 학자들은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해결되었는데 우리의 보물인 세계최초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은 언제나 프랑스에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지. 일본이 훔쳐간 우리의 유물들은 또 언제나…

 

탈리반이 이슬람 문명이 수립되기 전에 제작되었다는 이유로 파괴한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 불상은 현대의 미친 종교와 전쟁광들의 희생물이다. 이런 희생물은 9.11테러로 정점을 이룬다.

이렇듯 미술을 보는 여러가지 코드를 알고 보면 작품이 내게 감응해 오는 바가 다르지 않겠는가. 역사는 가르친다.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꼭 아름답지도 않고, 심란하기까지 한 작업들에 분노하지 말라고, 마음 편히 기다려달라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따뜻이 격려해 달라고.

 

다음엔 우리 그림 바로 보는 책도 읽어봐야겠다. 균형을 위해서. 편식은 해로우니까. 독서의 편식은 한쪽두뇌의 이상발달로 올까? 그래서 찌그러진 머리가 되어 버릴까 봐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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