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겨울엔 도서관이나 파먹을까?’(4)

▲ 지음 : 이윤기 출판 : 열림원
보던 책 다 읽지 않고 또 딴 책 보시오?”
보던 책을 덮어 올려놓고 다른 책을 보고 있는 내게 남편이 던진 질문이다.
“지금은 사회과학시간인 셈. 학교 수업도 종일 한과목만 하나? 어때서?”
“허어, 그런 거요?”

연애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장을 보는 편이지만 다른 책들은 다 읽는데 여러 날이 걸린다. 나름의 책 읽는 방법이라 여기는데 보는 눈은 아닌 모양이다. 교과서만 진도를 따라서 하라는 법은 없을 터. 아니 그런가? 지루해서 양이 부담스러워서 도중에 팽개치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인 방법이라고 믿는데 책읽기에도 편견이 존재하나 보다
이윤기는 ‘그리스 로마신화’로 내게 확실하게 존재를 새겼던 작가인데 이윤기를 내 관심의 수면위로 확실하게 밀어올린 작가가 강유일이다. 강유일은 대충 내 또래로 나에겐 부러운 존재였다. 19세에 소설을 써낸 아이. 신화에 정통해 있는 아이.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청동에 올라있는 검푸른 녹 같은 신화가 묵은 때처럼 끼어 있곤 했다.

그래서 올 겨울 이윤기의 작품들을 두루 섭렵할 계획이기도 하고
왕성한 글노동 참참히 써둔 수상집인데 여기에도 신화는 빠지지 않는다. 그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이기도 한데 글 쓰는 이라서 짚고 넘어가는 것들이다.

술은 사람의 거리를 단축시키는 마술로 그래서 술자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관습이 고수되고 있는 바, 그는 그것들을 성토한다.
‘후레자 삼배’ 고 해서 늦게 온 술꾼에게 내리 석 잔을 강요하는 버릇을 개개인의 취한 정도를 순식간에 평준화 시키고 함께 망가지는 수작이라 비난한다. 번번이 술잔을 들고 ‘위하여’를 외치는 버릇 또한 잘 흘러가던 대화를 잘라버리거나 원점으로 되돌려 버리는 악습이라 말한다

그러다가 기껏 한다는 짓이 ‘고스톱 판’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술 문화. 당장 생각나는 사람 몇은 있을 것이다. 술잔치는 말잔치여야 한다. 대작의 목적은 대화이지 술 자체가 아니다. 술이 목적이라면 친구는 필요치 않다. 따라서 ‘술맛’ 떨어진다는 표현도 옳은 표현이 아니다. 떨어지는 건 ‘사람 맛’이지 ‘술맛’이 아니다. 옳은 말이다. 내 주량과는 상관없이 즐기는 술자리를 맛 떨어지게 하던 범인들을 잡아낸 순간이다.
우리나라처럼 온갖 종교가 번성한 나라도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니 종교갈등은 시한폭탄일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에서 이윤기가 말하는 다음 충고는 필수덕목이 아닐까

“나는 당신의 종교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 한다”
“우리의 천국은 다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천국구경을 한사코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 구절이 널리 전파되고 공감을 얻는다면 우리는 머리가 없어진 단군상을 영영 볼 수 없을 지경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메세지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생각 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初段은 된다’ 라고 한다. 나도 동감이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잘 썼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글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다는 걸 언제나 나도 느낀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꼭 말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들려주듯 썼을 때 공감을 얻은 경험이 있으니까.

이쯤해서 생각나는 지난 년 말의 ‘진안문학상’ 시상식이다.
축사를 해야 할 운영위원장께서 정성들여 만든 원고를 깜박 유기하고 왔다는 거다. 그래서 그가 시상식 날 아침에 남편과 어떤 대화를 했고, 왜 시간에 늦었으며, 머리손질을 못했는지, 알게 되면서 진안문학상은 수수하고 가까운 상이 되었다. 원고대로 읽는 분이 아니긴 하지만 원고를 안 가져 온 사실을 안 순간 그이는 마음을 비웠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발화의 상황’에 소탈하게 대응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축사는 우리를 편한 마음으로 따라 웃게 만들었다

“부탁을 거절 할 수없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부탁하려고 전화 걸었다가 저쪽으로부터 오히려 부탁 받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공짜로 물건을 받으면서 하나 더 달라고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탁을 하고 부탁을 받는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범인들은 그가 좋아하지 않는 짓을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여긴다. 그는 너무 따지는 사람인가? 그러나 아닐 것이다. 우리의 선비문화 - 예의와 염치를 아는 문화속에는 이런 삼가와 배려가 항상 배어 있었다. 말 안해도 서로 살펴주기엔 너무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인가?

그가 추천하는 시 같지 않은 그러나 시임에 틀림없는 시 하나 올려 볼까
“그러니까 무슨 분위기 좋은 찻집 같은데,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다 말이지… 농담따먹기만 하고 있단 말이지… 그만 앞에 놓인 찻잔을 엎질렀단 말이지… 그런데, 정작 쏟아진 것은 이쪽 마음이다 이거지” 캬하!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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