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신 재경군민회상임고문, 서울타임스 회장

어느날 동네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듣는다. 이 어머니는 마을의 이제 우리세대 마지막 역사를 의미한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손윗동서 시집살이에도 고된 줄 모르고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아서 키우는 정말로 그 시대 현모양처였고 요조숙녀였다. 시집살이 층층시하 그 속에서도 쇠죽 끓이기, 대가족 끼니 넘기기에 사랑방 손님들 단자밥 내 오기에도 하나도 성가시게 생각하는 표정 없이 그 어머니는 항상 웃으면서 살아 오셨다. 어릴 적 우리들에게는 마치도 그 어머니가 하늘에서 하강하신 선녀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못된 짓도 참 많이 했었던 기억들이 있다.
정월 보름날, 쪄내다 우물가에 식히려고 내 놓은 찰밥 시루를 몸땅 들어다 밤참으로 먹어버린 우리들 사랑방 손님들을 그냥 기가 막힌 웃음으로 당황케 하셨던 그 어머니였다.
종자 닭으로 길러오던 씨암탉 두 마리를 닭장 밑에 함께 기르던 토끼 암수 두 마리와 함게 밤참으로 먹어버린 우리 사랑방 손님들을 부지깽이를 훠이훠이 휘두르며 쫓아오시다가 넘어져서 몇 달을 고생하시던 그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를 등에 업고 10리길을 다니면서 치료로 반성하던 그 친구는 지금 죽고 우리 곁에는 없다.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하노라며 한사코 견디시던 그 어머니가 큰 아들 따라서 서울 살림을 시작했을 적 그 마을의 우리들 사랑방꾼들 모두가 모여서 어머니의 상경을 환영한 것이 벌써 스무해가 넘었다. 그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그 사랑방 꾼들이 다시 모였다.
“오매는 꽃상여를 타고 가고 싶어 하셨는디” 아들이 조문객들에게 말한다. 아하, 꽃상여. 그랬었다. 언제던가 정초에 사랑방 꾼들이 함께 세배를 갔었는데 그때도 그랬었다. “그 시절 가난했어도 꽃가마 타고 시집 왔당게. 죽으면 꽃상여 타고 서럽게 서럽게 울어쌓는 울음소리 들으면서 가고 싶당게.”
갑자기 우리는 잊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서러움을 깨닫는다. 그랬다. 죽음은 서러워야 한다. 어이, 어이 아들들이 울음소리 굵게 굵게 서러워야 하고, 오매, 오매 딸들의 울음소리는 담 밖을 넘어 처량하게 서러워야 한다.
우리 사랑방꾼들은 서럽게 가고 싶어 하셨던 이 어머니의 의미를 지금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이심전심으로 작정했다.
“북망산이 멀다더니 건너 산이 북방일세”
핑경넣는 저 녀석의 목성은 언제 들어도 구성지게 서러워진다. 그날 우리 사랑방 꾼 아홉명은 꽃상여를 어깨에 메고 서럽게 정말로 서럽게 울면서 서낭당(城隍堂, 성황당)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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