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되겠다는 꿈… 성공의 열쇠

▲ 송재영
송 재 영 씨
정천면 갈용리 교동마을 출신
경원수출포장상사 대표
재경정천면향우회 부총무
재경진안군민회 사무차장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인간이 자신의 근본을 잊고 교만하여 지고, 자신의 근본에 대하여 외면하면서 불행하여진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다시 불안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알아버린 순간부터 자신의 소임에 대한 불안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죄책의 사면을 호소하려는 의미로 신에게로의 회귀에 도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의 변화하는 행위이기 보다는 신과 동등하려는 인간의 교만임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그 불행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 사건이거나, 구약시대 시날 평지에서 있었던 바벨탑 사건들은 그것들 모두가 신에 도전하였던 인간의 교만 그것 이였다. 이 글의 주인공 송재영씨가 일찍 그것을 깨닫고, 노아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인간들의 끝없는 용서와 배반의 연속이 반복되는 그 속에서도 모태신앙의 주인공 그의 아내 황용주씨를 만나는 소설 같은 그 사건이거나 그로 인하여 그가 일찍 천주교에 귀의하여 「힐라리오」라는 세례명을 받을 수 있었던 사건 같은 일들은 정말 그에게는 축복받는 행운이었음을 그는 항상 잊지 않고 있단다.


1954년, 송재영씨는 교동부락 한 가난한 농가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향리 교동부락에서 정천국민학교와 정천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은 그에게 어림없는 일이였다.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는 너무나 일찍 너무나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아품으로 방황하는 한 세월을 그렇게 보낸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으로 또는 조금은 늦게 찾아 온 듯한 사춘기적인 감상으로 가슴 조이는 그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이 농촌의 현실이 자신에게 처방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깨닫는다. 빈농의 가정에서 일가의 장남으로 태어 난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다. 이렇게 자신의 운명과 씨름 하고 있었던 그에게 반란의 태풍이 몰아 처 온다. 그것은 변화의 용기였고 피 끓는 청춘의 도전 이였다고 송재영씨 그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작정 상경 길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 당시 돌파구 없었던 농촌 청소년들의 유행 같은 수단 이였고 바램 이였고, 그리고 거듭 남 그 자체였다고 송재영씨는 그렇게 회고 한다. 그것이 당시 어른들의 눈길로 그 잣대로 바라 볼 때 무모하고 위험하고 걱정되는 그런 것 이였겠지만 꽉 막혀 있어서 그래서 옴싹 달싹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숨통을 그렇게 틔워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어쩌랴. 그렇게 강조하는 오늘의 송재영씨는 창 밖의 그 하늘을 넘겨 보면서 깊은 한 숨으로 그의 마음을 대신한다. 어찌 되었든 그는 열 아홉 살 그 나이에 망망대해에 던져진 그런 심정으로 향수를 배우고 불안을 이겨가는 방법들을 터득하면서 외로움의 의미를 가슴으로 익혀가면서 서울 사람이 되어 간다. 인간이 역사이래로 정착하면 이루어 내는 그 운명의 존재를 깨닫고 배워 간다. 정체되어 있는 찌꺼기가 썩어가는 그 진리도, 흐르는 물이 항상 맑더라는 평범한 그 진리도 그는 그의 마음속에 소중하게 접수하여 간직한다.

삼양포장 공원으로 3년은 그에겐 버릴 수 없었던 「터」 였다. 주경야독의 의미도 여기서 일구어 냈다. 한으로 맺혔던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서울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은 아니래도 그래도 그 시간들은 그에게 삶의 가치와 인간의 긍지를 배워 준 그런 시간들 이였다.
1975년, 입대하여 제대한다. 34개월 그 시간의 소중함은 황금 같은 것 이였지만 병역이 그에게 주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그것은 국민의 자존심이고 남아의 긍지라고 그는 힘주어 강조한다. 제대하고 삼양포장에 재취업한다. 그리고 10년. 대덕포장에서 그 몇 년, 대명필지에서 또 몇 년, 그의 인생은 그렇게 영글어 갔다. 타향살이 몇 십년에 청춘은 그렇게 늙어갔고, 터득한 인생의 그림자는 항상 웃음 없는 속 깊은 청년으로 그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지하 공장에서 습기와 혼탁한 불량환경과의 싸움, 장마철 문 턱 넘어 쏟아져 들어 온 홍수 속에서의 망연자실하던 그 침수사고, 흘러 간 세월 속에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단다. 아내 황용주씨(충남보령)와는 중매하며 연애하며 그렇게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사연으로 결혼하여 1남1녀의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해 다섯 명의 동료들과 힘을 모아 주식회사 『경원수출포장상사』를 창업하여 그 대표에 취임한다. 그는 자신의 이 길이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 진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이 길을ㅡ 간다고 했다. 그릇만큼만 물을 채운다는 자신의 좌우명도 그는 갖고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꿈도 그는 갖고 있다.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성공의 그 길인 것을 그는 거듭 강조한다.
6.25국가 유공자인 그의 부친은 갈용리 무거부락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계신다. 각자 다른 종파에도 그들 형제들은 아무 문제없이 나름대로 조상 섬기기에 힘쓰고 형제들의 우애도 돈독하게 이끌어 간다.
우리의 고향사람 송재영씨. 수몰되어 사라진 고향마을의 그리움을 안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살아실제 효도하고 싶어 요즘 부쩍 많이 생각 키워 눈시울을 적시면서 그리워지는 노부모님들 생각으로 젖어있는 이 장남의 마음은, 어려운 인생길 이였고 하마터면 의미 없는 인생길이 될 수도 있었던 그의 이 길에 반려자 되어주어 함께 걸어 준 아내에게도 큰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고 했다. 오늘도 그는 출렁이는 용담호에 잠겨 간 뒤뜰의 그 똘감나무가 그렇게 그립단다.
스쳐가는 향수의 그늘 곁에 송재영씨는 그의 애창곡 고향무정을 중얼거리듯 불러 본다.
(H.P : 011-312-9050)
/서울취재본부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