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외상사절(外上謝絶). 자주 갔었던 단골 주점이나, 집 앞의 골목가계 같은 곳에서 벽보처럼 붙여있었던 이런 내용의 글귀를 읽으면서 이 단어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우선 자신의 주머니 속사정을 한번쯤은 챙겨 본 기억이 있었을 필자세대는 더러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아무나 신용카드 몇 개쯤은 상식적으로 지참하고 있겠으니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던 그 시절의 외상은 자의였거나 타의였거나 상당한 신용을 담보하던 제도였을 때가 있었다.

외상이라는 지극히 다정하고 긍정적인 독립된 단어와 사절이라는 차겁고 부정적인 이 단어의 합성어가 외상사절이라는 국적불명의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단어로 변형되면서 인간의 신용을 매도하는, 그래서 긍정과 부정의 잘못된 화합의 뒤끝이 이런 것이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요즘 시국을 바라보는 노파심에서 해 보면서도 혼자서 그만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사람의 얼굴 표정에 따라서 교묘하게 말을 하고 그 사람의 기분에 맞추어 알랑대는 사람들은 대개 잘 비비고 출세에 앞서가는 사람들인데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였다. 그것도 인간의 능력이라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으나 이들이 있어 명랑한 사회를 만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라가 잘못됨에 탄식 하는 체 하면서, 돌아 서서는 딴 마음으로 자신만을 챙겨 나서는고위층 지도자들, 일컬어 매국노와 그 일당 그 일족도 있었다. 지금 매국노의 그 후손들이 악용하는 그 법에 대하여 정부와 공직자들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는 민중들의 시선들을 외면하지 말자. 그들 맥수지탄(麥秀之嘆) 무리들의 일망타진이야 말로 국가 백년대계의 설계가 아니겠는가. 맹자직문(盲者直門)이라 하였으니 장님이 문을 바로 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우연히 요행수로 성공을 거두는 지도자가 있었다면, 또 있다면 이제 그들은 좀 비켜 갔으면 좋겠다. 새로운 민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지 않는가.

면종복배(面從腹背)라 하였나니 앞에서는 따르는 체 알랑대면서 뒤에서는 배반하고 딴 짓하는, 그래서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그런 무리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들이 이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풍속을 오염시키는 그러한 사례들이 없어졌으면 참 좋겠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武將) 마속(馬謖)은 재주가 뛰어 난 병략가였다. 제갈량의 명으로 북벌에 참가하여 일군(一軍)의 통수가 되었으나 촉한의 요지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위나라에 크게 패하매 촉한의 중원공략 계획이 허사로 돌아간다. 제갈량은 이를 애석하게 여겼으나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의 목을 벤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고사를 읽으면서 이 시대 우리의 정치사를 생각한다.
생겨진 사태에 누구인가 책임지는 지도자가 이렇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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