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박규희
박 규 희 씨
상전면월포리금지마을 출신
(주)예슬종합주류/예슬종합마트 대표
강동구암사1동방위협의회 회장
강동구암사1동주민자치위원회 위원
재경상전면향우회 총무

1970년대. 마음이 가난하고 하얀 마음을 가진 한 24세의 소녀가 이모네의 집안일을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서 손님들을 배웅하고 또 부엌일을 도우면서 간간히 묻어오는 고향생각에 멀리 안개 속에 피어오르는 남산 쪽의 향수에 울컥 서러워지기도 하면서, 혐오스러운 사건들과, 오만한 사회의 못된 인간들의 저주스러운 행태들은, 악취 나는 기분으로 그냥 지켜보면서 하루하루를 역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가난에는 익숙해 져 있었고, 세파를 함께 헤쳐 가는 그 방법에도 능숙해 져 있었다. 그 시절, 그 사회에, 어려운 자취생활로 시작하여 어렵고 배고픈 현실에서 멍청할 만큼 용기 있게 도전하여 내 생활을 찾아보겠다고 중세의 돈키호테처럼 찾아 온 24세, 그 또래의 세 소년이 있었다. 이미 그들은 청운의 꿈에 젖어 그렇게 찾아 온 그것은 더욱 아니였고, 노동 판 현장을 전전하며 일당으로 하루를 이기며, 월 18.000원의 깔 세로 한 달을 이어가는 여인숙을 찾아 온 아이들 이였다. 이미 그들도 찌든 생활 속의 피곤한 여정의 나그네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그들이 두 번째로 찾아 온 서울은 그랬다.

호란한 도시였다. 참으로 무서운 그런 도시였다. 어려운 도시였다. 산 골 소년 박규희, 그들에게 서울은 참으로 희한한 요술의 도시였다. 청계천 어느 봉제공장의 공원이 자신의 온 몸에 신나(휘발유의 일종)를 뿌리고, 분신자살하였다는 거짓 말 같은 소문들이 떠돌기도 하였고, 이상한 유언비어 들이날만 새고 나면 그렇게 떠 돌고 있던 그 시절이였다. 어려운 농촌의 그 지긋 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는 모진 생각으로 찾아온 서울도 그들, 박규희씨에게 불안의 도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촌을 떠나 몰려온 공장 노동자들의 실태가 그랬다. 이상적인 노동세계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꿈 이였던 그런 시절 이였다.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당시의 현장 이였다. 고난의 삶과 고통스러운 노동현장의 노동현실을 분노하기 이전에 당장 오늘의 잠자리와 끼니를 걱정하는 호구지책이 더 문제였던 그런 시절 이였다. 그들도 그랬다.

우리의 고향사람 박규희씨와 그의 오늘의 반려자 유임순씨(공주출신.58년생)는 그러한 시절 그러한 현장에서 그렇게 조우(遭遇:우연히 서로 만남)한다. 인생과 삶과 투쟁과, 거기서 생기는 고민과 방황과,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그 이후에 생각하자. 그들은 우선 당장이 문제였다. 그들 두 사람은 우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사항을 먼저 갖기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작정 한다. 하루 24시간의 전부를 빛 한점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드래도 최소한 서로 외로워하지는 말자는 것이 그들 두 사람의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작정 이였다. 인간의 가치가 고귀한 것은, 부자의 그것처럼 약자의 그것도 같은 것이라는 공감대에 그들은 함께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인간의 권리를 외치면서 살았듯이 그들의 의무에 소홀하지 않으면서 살아 온 그들 내외의 일생은 양보와 헌신과 봉사의 그것 이였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 온 지 30여년, 네 아이(1남3여)의 부모로서의 역할에도 그 책임을 다 한다. 아내는 오늘도 새벽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하루를 챙기고, 남편의 하루를 챙기고, 또 중요 한 것은 사업장의 하루를 챙기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오래전 조물주의 의지를 배반하면서 오직 두 사람만의 허락되지 않은 의지로서 삶을 이어 가기로 작정하였을 때 자신들의 영혼 속에 감춰두었던 오랜 약속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리라.

박규희. 1956년 6월생. 이제 막 하늘의 두려움을 알게 된 세월이다.
그는 텃밭 몇 두럭에 천수답 몇 마지기로 7남매(3남4여)의 부양에도 힘겨워 하셨을 부모님의 그 고뇌와 잠 못 이루시며 줄담배로 밤을 잃어 가신 부모님의 그 고뇌를 잊을 수가 없다. 고향에서 그가 안천중학교를 마치고 일찌감치 상급학교의 진학을 포기하고 먼저 세상에 나가있었던 큰형을 따라서 고향 탈출의 대열에 일찍 참여 하였다거나, 또는 그가 허허벌판 같던 서울의 그 세상에 나가 중국 음식점에서 가장 밑 대열에서부터 일했었던 서울 삼선교의 그 시절이 있었다거나, 북아현동 시절의 가구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시험하던 그 세월이거나, 인테리어 목수로 보낸 그 10년의 세월이라거나, 강동구 암사동 에서의 망해버린 가구점의 잔해를 지켜보며 마음으로 통곡하던 그 세월이며, 리어카를 끌며 중고차를 운전하며, 과일행상으로 야채행상으로 서울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목 놓아 외쳐쌓던 그 절규는 어쩌면 망망대해에서 허우적대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자신 이였다고 박규희씨는 지금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 그렇게 쓸쓸하게 회고한다.

그는 외로움을 안다고 했다. 그는 배고픔을 안다고 했다. 그는 서러움을 안다고 했다. 그는 표효 하는 짐승의 그 절규의 의미를 안다고 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취해야 할 자세와 행동과 선택에 대한 무책임한 자신의 태만에 대하여 그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간적인 행위들이 동물처럼 배고픔과 같은 하나의 자극 때문에 결정된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는 허약한 자신의 제약에 대하여는 심한 분노와 수치를 느낀다고 했다. 그들 내외가 몇 십 년이 지나고, 어머니의 회갑연에 함께 날 받아 치루었던 결혼식에서의 그날 아내의 그 서럽던 흐느낌을 그는 오래 잊지 못한다. 아내에게 안겨 주었던 그 한을 그는 오래 기억하면서 아내에게 행복의 그 의미를 안겨 주리라고 다짐하고 있단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고향을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고 했다.

마을을 둘러 싼 갯밭들이 달의 모양과 같고 금강물이 포구와 같아 월포라 하였단다. 산이 밤중에 커 올라가던 중, 물 길러 나온 아낙네에게 들켜 그녀가 놀라 외치는 소리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는 꼬꼬봉도 그의 고향의 전설이다. 고향이 용담호에 수몰되기 직전의 해였던가, 마지막 고향을 지켜보기 위하여 몇몇 가까운 친구들이 월포강 가에 모여앉아 쏘가리와 빠가사리들을 손수 잡아 천렵(川獵)국을 끓여놓고 멀어져 가는 고향의 석양을 지켜보던 그때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고향이 천재지변으로 고향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비보에 접하고 제일 먼저 복구대열에 자원한 이도 박규희 그였다.

흙에 살리라.
어려운 세상을 살다보니 노래방이거나 무슨 잡기로서의 노래 같은 것도 즐겨 할 수는 없으나 그는 가끔씩 흥에 겨워 이 노래를 흥얼겨려 본단다.
멋대가리 없는 남자, 우리의 고향사람 박규희씨.
그는 오직 현실적 생활만 안고 산다고 그랬다. 그러나 가슴엔 항상 고향만 안고 산다고 그랬다. 그는 이제 세월의 바람 따라 인생의 중년기에 서 있다. 월포강 강가의 그 낚싯대가 그리움으로 가슴속에 스며오는 것도, 죽도의 수몰되어 간 그 놀이터가 그리움으로 다가 오는 것도, 숨을 거두면서도 고향쪽으로머리를돌리면서죽어간다는우리의그 향수가 아니겠는가. (H.P : 011-686-9955)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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