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마을을 찾아서 (9) … 상전면 용평지구(신연·대구평)

2월에 접어들면서 날이 많이 포근해졌다. 맑은 하늘에 날까지 따뜻하니 점점 우리 고장이 활기를 찾아가는 것 같다. 3월까지는 너끈히 버틸 것 같았던 산 중턱의 눈은 따뜻한 햇볕에 많이 사라졌고, 제설 모래로 지저분했던 도로도 많이 깔끔해진 느낌이다.
6일 오전. 진안읍에서 용담호를 끼고 뻗은 국도 30호선을 따라 나아갔다. 이번 주 신문에 실릴 ‘으뜸마을’을 찾아 가는 길이다. 오른쪽에 있는 용담호는 어느새 물이 많이 빠져 숨어있던 옛 삶의 터전을 잠깐 보여주고 있었고, 멀리 하늘에는 산새 몇 마리가 춤을 추듯이 날고 있었다.
얼마동안 도로를 달리자 길게 뻗은 다리가 하나 나온다. 마을 이름을 딴 월포대교로 길이가 1km하고도 50m이다. 그리고 이 다리를 건너서 바로 고정형 속도감시 카메라가 나오고, 그 양옆으로 상전면 용평리 신연마을과 대구평이 자리하고 있다.

▲ 신연마을 마을회관 2층에 있는 천체망원경. 전자동 장치여서 정확하게 별을 추적한다고.
◆수몰로 사라진 마을
용평리는 본래 용담군 이남면 지역인데,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평리와 운룡리를 합쳐 정천면에 편입됐다. 그러다 1987년 상전면에 편입되고, 용담댐 건설로 모든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지금의 신연마을과 대구평마을이 새로 조성됐다.
지금은 21가구 42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70세 이상 노인이 마을 인구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연마을은 1600년 임진왜란 때 내금위를 지낸 안수홍이 전사하자, 부인 권씨가 네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터를 잡아 죽산 안씨 집성촌이 됐다고 한다. 이때 권씨는 이전 고갯길보다 편한 새 고갯길을 내서 마을 이름을 신현(新峴)이라고 붙였고, 1816년 안봉구라는 사람이 서당을 세우고 ‘장차 벼루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게 되라’는 염원으로 ‘고개 현(峴)’을 ‘벼루 연(硯)’으로 바꿔 지금의 ‘신연(新硯)’이 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신연마을을 ‘새벼리’라고도 부른다. 새벼리는 ‘새 벼루’에서 나온 말인데, 수몰 전 신연마을이 벼루혈의 풍수지세를 갖고 있는데서 유래했다.

대구평마을은 본래 월포리 동쪽에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 역시 용담댐 건설로 물에 잠겨 지금의 위치로 마을 사람들이 이주해 다시 만든 마을이다. 수몰 이전 이 마을은 강가 버덩에 펼쳐진 들이라는 뜻으로 대구평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원주 원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 앞에는 오래 된 비석과 새로 만든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오래된 비석은 입향조(入鄕祖) 원광옥의 아버지 원승길 신도비로 수몰 전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이다.
이 밖에도 용평리에는 부항, 운암, 평은, 방아골(방화동), 청안(청응) 등 많은 자연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용담호 아래 잠들어 있다.

향토문화백과사전에 따르면 부항은 오리혈의 지세 때문에 오리목골로 불렸던 마을이라고 한다. 이 마을 어귀에는 두 기의 선돌이 50m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는 높이가 175cm, 다른 하나는 130cm였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두 선돌이 물오리가 물을 찾아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 부분을 눌러놓은 것이라고 한다. 수몰전 35세대 187명이 살았다고 한다.
운암은 용담군 이남면 면소재지였던 큰 마을이었다. 수몰 전 이 마을은 금강 상류와 둑을 경계로 위치하는 강변마을이었다. 마을 형세는 구름 속에서 용이 나오는 모습인데, 이 마을 뒤편으로 운중발룡(雲中發龍)의 명당이 있었다고 한다. 면소재지였던 만큼 이 마을에는 45세대 160명이 거주했다는 기록이다.
평은은 이전에 와은(臥隱)이라고도 불렸던 마을이다. 와룡선생(제갈공명)이 숨어 사는 곳이란 뜻인데, 마을 앞을 흐르는 강 이름이 남양강으로 제갈공명이 살던 곳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수몰 전에는 23세대 88명의 주민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 앞이 옛날 경로당이고, 뒤가 지금의 마을회관이다. 옛 경로당은 마을 공동작업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버섯으로 소득 높여
비보호 좌회전으로 신연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조그만 쉼터와 함께 ‘으뜸마을 가꾸기’ 안내판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제실이 눈에 띠고 조금 더 들어가면 널찍한 마당이 있는 낡은 경로당이 나온다.
조립식 형태로 지어진 이 경로당은 천문대까지 갖춘 새 마을회관이 건립된 후 마을 주민들의 공동 작업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 경로당 주변에 쌓인 작업 흔적만 봐도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 승용차를 세워두고 안기조(52) 으뜸마을추진위원장을 만나 버섯 재배시설로 향했다.
마을 뒤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산을 돌아가니 용담호가 펼쳐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리고 새로 닦은 것 같은 널찍한 터에서 마을 주민들이 버섯 재배에 사용할 참나무 토막 더미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어서 안 위원장은 올해 버섯 농사에 사용할 참나무를 소독하는 시설하우스로 기자를 안내했다. 진한 한약 향기와 뿌연 김이 하우스 안을 채우고 있었다. 높은 온도로 가열한 김을 참나무 토막에 쐬어 살균하는 과정이다.

▲ 신연마을에서 내려다본 용담호. 용평리는 주변이 용담호에 둘러쌓여 있다.
우리 고장 버섯연구회에서 6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 만큼 안 회장은 버섯에 관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버섯은 재배 면적당 소득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 마을 버섯은 친환경인증까지 받은 우수 기능성 버섯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 버섯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어요.”
버섯은 초기 투자비용이 높은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 게다가 용담호로 둘러싸인 청정 자연환경 덕에 이곳의 버섯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안 위원장은 버섯이야 말로 이 마을에 가장 적합한 작목이라고 설명했다.

◆훌륭한 관광자원 갖춰
이 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앞서 얘기한 용담호로 둘러싸인 자연 경관이다. 조만간 마을 가장자리로 산책로를 만들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데, 당초 으뜸마을 계획대로 도시 사람들이 마을에서 민박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게다가 마을의 자랑인 버섯을 비롯한 각종 밭작물 재배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마련하면 명실상부한 농촌관광마을로 자리잡을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 지난달 새로 지은 대구평마을 경로당. 신연마을 마을회관과 더불어 마을 주민들의 소중한 사랑방이다.
특히 이 마을에서 자랑하는 것은 민박이 가능한 마을회관이다.
신연마을 마을회관 지붕을 보면 둥그런 모양을 한 천문대가 보이는데, 앞으로 이곳에서 민박하는 도시민들은 농촌을 체험하는 것은 물론, 최첨단 망원경으로 신비로운 지구 밖 세상까지도 경험할 수 있다.
또 이 마을회관 2층은 20~30명은 거뜬히 지낼 수 있을만한 펜션 수준의 방이 마련돼 있다. 잠은 물론 취사도 가능하기 때문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현재는 가장 좋은 운영방안을 찾기 위해 시범적으로 하루 7만원에 빌려주고 있다고 한다. 물론 방을 빌려주고 받은 돈은 마을 노인들을 위한 복지에 사용된다.
이 밖에도 이 마을은 건너편 대덕산 계곡을 활용해 여름철 피서객을 유치하는 방안, 재래식 장류 생산·판매, 한과 생산, 두부 생산 등 다양한 소득 창출 방안을 연구하거나 진행하고 있다.

◆작은 마을 대구평
신연마을을 둘러보고 도로를 건너 대구평 마을로 갔다.
신연마을과 대구평마을 사이로 뻗은 이 도로는 자동차 통행이 많은데, 지금의 속도감시 카메라만으로는 마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신호등을 세워 마을 주민들이 마음 놓고 왕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바람이다.
길을 건너면 먼저 마을 입구에 있는 신도비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면 지난달에 새로 문을 연 마을 경로당이 깔끔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 대구평 마을 입구에 있는 원승길 신도비(왼쪽) 수몰과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마을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오는데, 마침 대구평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쉼터에 한 노인이 앉아 따뜻한 햇볕을 쐬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저 넘어에 있었어.”
오래 전 교통사고로 다쳐 지금도 몸이 불편하다는 원붕희(75)씨가 수몰전 대구평마을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대구평마을에만 한 50가구가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코앞에 있는데도 못가.”

용담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지금의 대구평마을에는 여섯 집만 이주를 했다고 한다. 이야기 도중 원씨는 본래 마을이 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추억에 잠긴 듯 착찹한 표정을 지었다.
원씨의 이야기는 서울에 살고 있는 자녀 이야기로 옮겨갔다. 이번에 둘째 아들이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식농사 하나는 제대로 지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 원씨의 얼굴에 환한 햇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유명세보다 성과로 보여줘야”

용담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었던 사람들. 안기조(52) 으뜸마을추진위원장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라는 희망과 자신감으로 제2의 고향을 가꿔가고 있다.
“용담댐 건설로 마을은 물론 농지가 물에 잠겨 우리 마을 주민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만 지어놓고 물에 잠긴 마을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죠. 그래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용담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었던 사람들. 안기조(52) 으뜸마을추진위원장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라는 희망과 자신감으로 제2의 고향을 가꿔가고 있다. “용담댐 건설로 마을은 물론 농지가 물에 잠겨 우리 마을 주민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만 지어놓고 물에 잠긴 마을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죠. 그래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처음 안기조 위원장이 마을을 위해 시작한 것은 주민들이 일하고 소득을 올리는 것이었다.
물에 잠겨 코앞에 두고도 갈 수 없는 고향만 바라보며 한숨만 쉬던 주민들에게 돗자리를 만들게 하고, 자신이 소유한 산에 있는 매실나무를 나눠줬다. 그리고 뽕나무도 나눠주고 누에를 치게 했다. 이런 안 위원장은 물론 주민들의 노력 덕에 마을은 점차 활기를 찾아갔다.
고향을 떠나 지금 마을로 이주한 뒤 좀처럼 뭉치기 어려웠던 마을 주민들은 이런 계기를 바탕으로 한 고향 사람으로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으뜸마을가꾸기 대상지역으로 선정된 것도 이런 경험 덕에 가능했습니다. 아마도 주민들이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거 같아요.”
다만 안타까운 것은 으뜸마을로서 이 마을이 가야 할 길은 멀지만, 노인 인구가 많아 진행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 위원장은 그것조차도 이 마을의 장점으로 키워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물론 노인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업을 진행한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 노인들이 살아오면서 쌓은 경륜은 무형문화재로 봐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위원장이 생각하는 마을의 미래 한 축은 ‘실버 복지’가 자리하고 있다. 노인들이 꾸준히 일하며 소득을 올리고, 이들 각자의 특기를 살려 도농교류 등으로 연결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마을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곳은 체험마을이다 뭐다 해서 이것저것 손 데고 있는 게 많잖아요. 하지만 우리 마을은 그렇게까지 많은 일을 하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으뜸마을 가꾸기 사업’ 하나에만 집중해 더 효율적이고 압축된 마을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내실을 다져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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