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일찍 개화되어 객지생활에 이골(익숙해져서 몸에 푹 밴 버릇)이 되었던 그의 아버지는 풍류객은 아니였다 하여도 바람 따라 전국을 주유(周遊:두루 돌아다니며 놂) 하던, 말하자면 사주팔자에 역마직성(驛馬直星:늘 부산하게 다니는 사람)이 꽉 낀 그런 위인 이였다고 후일 그의 어머니는 두고두고 평생을 자신의 인생을 싸잡아 아버지를 저주하며 살다 가셨다.

「저 웬수(원수)땜에 내 인생을 망쳤당게」로 시작되는 그 어머니의 푸념은 때로는 며칠씩 계속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 속 깊숙한 자리에 숨어 있었던 진심이 아니였음을 그가 본 것은 아버지 가시고 수년이 지난 어느 기일(忌日)에 였다. 깊숙하게 숨겨 간직하고 계셨던 한 장 빛바랜 흑백 사진을 꺼내놓고 꺼억꺼억 울고 계시던 그 어머니가 들려 준 사연은 그랬다.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에 그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었단다. 혼례라고 치른 다음 날 그의 아버지는 다시 바랑을 짊어지고 나섰다. 그 아버지는 한번 집을 나서면 몇 달이 되어서야 집에 잠간 얼굴을 내밀고 그리고는 또 새벽같이 길을 떠나고 하였다.

아무 말 없이 그 어머니에게 쥐어주는 동전 몇 잎이 그 아버지 마음의 전부였단다. 참으로 그 아버지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인사라고 그 어머니는 혀를 차기 일수였다. 그리하던 그 아버지가 네 명의 그의 형제들을 어머니와 함께 이끌고 새벽을 도와 외할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을 등졌단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난 어쩌면 잊고 살아가던 그 어머니에게 친정엘 다녀오자고 하더란다. 병암리 역에서 내려 늦은 저녁 보름 달빛을 받으면서 앞서 핑핑 걸어가는 그 아버지를 따라서 그 어머니는 약주 병을 앞가슴에 조심스레 껴안고 뒤를 따라간다. 얼마동안 그렇게 말없는 행진이 이어진다. 재 밑까지 그렇게 걸어가던 그 아버지가 그 어머니를 돌아본다.

「……」 「달이 참 훤히도 밝지?」
깜짝 놀라면서 멈춰서며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눈을 올려 뜨는 그 어머니에게 그 아버지의 의외의 물음이 던져진다.
「보름 달 인개 그렇지 라우, 내 참.」 무슨 달밤에 운동하는 소리냐는 듯 그 어머니는 그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재를 올라간다.
「저러언 멋대가리 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구,」
그 아버지도 땅에 침을 탁 뱉아 발로 비벼버리고 화가 나듯 그 어머니를 따라 재를 올라간다. 그 날 그 어머니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본 것이다. 얼굴이 붉어지고 뛰는 가슴의 고동소리를 행여 그 아버지에게 들킬세라 뛰듯이 재를 넘어 왔단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많은 풍속도가 바뀌어 간 그 후에 가난한 집안의 장손으로 재산조차 또는 신분조차 보잘것없는 그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인은 그렇게 쉽게 나타나지 않다가 겨우 연애라는 마술을 부려서야 지금의 아내를 만났단다. 그 여인의 나이 이십 사세, 그의 나이 삼십 일세, 참으로 도둑놈의 심뽀(마음보)가 아니였으면 어림없는 사건 이였다고 그는 지금 술회하고 있다. 처음 데이트라는 것을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은 기회를 탐하는 그런 순서였단다. 함께 설렁탕 집에 들려서 곰탕 두 그릇을 주문하였단다.

「곰탕은 곰 고기로 만들어요?」 여인의 그 질문이 그의 도둑 심뽀에 화살이 되어 꼽혔다. 찡한 가슴의 혼란을 안고 그들은 혼인하여 사십년을 두 아들,두 딸 낳고 잘 살았단다. 그런데 요즘 일흔 한살의 그에게 예순 네 살의 그 여인은 황혼이혼이라는 가슴 설레는 숙제를 안겨 주었단다. 참으로 여자는 알 수 없는 갈대다. 참으로 그는 어찌 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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