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마을을 찾아서 (10) …정천면 봉학지구 학동마을

우리 고장의 11개 으뜸마을은 각 마을별로 각자의 환경과 장점을 살려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구감소와 노령화, 전문성 부족 등 으뜸마을을 만들어 가는데 많은 어려움과 걸림돌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미 우리 고장의 으뜸마을 가꾸기 사업은 전국적으로도 모범적인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으뜸마을을 찾아서’라는 연재 기사가 마지막 회를 맞았습니다. 각 으뜸마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더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이후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가제)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으뜸마을을 찾아서’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우리 고장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각 마을의 소소한 모습을 세밀하게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내. 가뭄에도 흐르는 물이 꽤 많았다.
13일, 오후 늦게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나오더니, 하늘이 흐려진다. 시간이 갈수록 구름이 짙어지는 게 비가 오긴 올 모양이다.
마지막 ‘으뜸마을을 찾아서’는 ‘씨 없는 곶감’으로 유명한 정천면 봉학리 학동마을이다. 정천면 소재지에서 비교적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죽 나아가면, 도로 옆으로 물이 적게 흐르는 내가 같이 따라온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씨 없는 곶감마을’이라는 새로 지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만 봐도 ‘학동마을에 다 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학이 돌보는 마을
학동마을은 정천면 봉학리에 속한 마을이다.
봉학리는 용담군에 속했던 곳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봉산리와 학산리 일부를 합쳐 정천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본래 많은 마을이 봉학리에 속했지만, 용담댐 건설 후 대부분의 마을이 물에 잠겨 지금은 학동마을과 마조마을, 상항 등만 남았다.
일단 이번에 다룰 학동마을만 살펴보자.
학동마을은 마을 뒤 산골짜기에 용지천(영기천, 또는 영지천)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바위에서 학이 나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로 학동, 또는 학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군이 이곳에 물을 막아 물길을 주천방향으로 빼려 한다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낼 것이라고 하니 나중에 큰 갈등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중엽 전주 최씨와 경주 이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현재 이 마을에는 29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다.
정천면 끝자락에 있는 산골 마을이지만, 이 마을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학군이 피난오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운장산에 들어간 공비가 자주 출몰해 마을에서 전투가 빈번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마을은 전쟁 후 재건된 마을인데, 마을 동남쪽 산골에 가래박골이라는 화전마을이 1960년대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 학동마을 입구에 있는 '꼬깜똑'이라는 펜션 시범주택. 분위기가 유럽풍이다.
◆어울려 살아가는 주민들
‘씨 없는 곶감마을’에서 얼마 가지 않아 이정표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학동마을, 곧장 가면 마조마을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이정표 앞에는 마을 유래를 빼곡이 적은 마을유래비 겸 마을 표지석이 있는데, 곶감으로 유명한 마을답게 붉은 색으로 선명하게 감 모양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꼬깜똑’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펜션 시범주택’이 있는데, 외국 산악지방(아마도 스위스 정도가 될 것 같다.)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모양새다.
다시 마을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을이 시작되는 곳에 꽤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낡은 농구골대 2개가 예전에 학생들이 많았음을 증언하는 것 같다.
마침 화물차 한 대가 마을 정자나무 앞에 서더니 여성 2명을 내려준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한다.
최창순(70)씨와 이순옥(72)씨다. 정천면 소재지에 농협에 함께 다녀오는 길인데, 웃는 모습이 10대 소녀 못지않게 순박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뒤에 있는 폐교에 대해 묻자 최창순씨가 예전 시끌벅적했던 학교의 모습을 그려냈다.

▲ 마을 정자나무 앞에서 만난 최창순(왼쪽)씨와 이순옥(오른쪽)씨
“꽤 큰 학교였어요. 학생이 100명도 넘게 있었어요. 우리 아들하고 딸도 다 여기서 공부했어요.”
아마도 당시 떠들고 장난치던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그리운 모양이다. 이순옥씨도 학교가 없어지고 나서는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진 후 마을 왼쪽 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았다. 골짜기 안에 폭 안긴 모습이 참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집집마다 지붕과 기둥으로만 만들어진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주민들 설명을 듣고 안 것이지만, 이게 바로 곶감을 말리는 건조시설이었다.
그중에는 철근과 판넬 등으로 튼튼하게 만든 것이 눈에 많이 띄었지만, 예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나무 건조시설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곶감 말리는 철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곶감이 매달린 모습은 올해 가을에 꼭 사진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발길은 마을회관 방향으로 향했다.
학동마을 마을회관은 예전에 1천만 원 가량을 군에서 지원받아 마을 사람들이 손수 지은 곳이다. 당시 한 주민은 공사 기간 한 달 사이에 27회나 나와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평균 17~18회 정도 나와 마을회관 공사를 했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마을일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 마을을 죽 둘러보니, 마을회관 뒤쪽으로 토종벌집이 죽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침 겨울이라 날아다니는 벌은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마을회관 옥상에서 내려와 마을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마을회관에서 주민 한 명이 나와 점심밥을 먹고 가라며 손짓한다.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어서 염치를 무릅쓰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아까 마을 정자나무에서 만났던 최창순씨와 이순옥씨도 앉아 있었다.
“집이 마을 맨 뒤에 있어서 점심이나 먹고 올라가려고.”
학동마을 역시 마을 주민들이 서로 우애가 깊다보니 점심은 늘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특히 이날은 점심식사 후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울 예정이었는데, 마감에 쫓겨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와야 했다.

▲ 산촌종합개발사업으로 탄생한 '씨없는 곶감마을' 공동작업장과 휴양객을 위한 숙박시설이 있다.
◆곶감 기반 구축 한창
현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곳곳은 계속 공사가 진행중이다.
잡목을 베어낸 자리에는 씨 없는 감나무 묘목을 심었고, 마을과 가까운 산에는 길을 내서 나중에 마을을 찾는 휴양객들이 산책하면서 구경도 하고, 쉴 수 있도록 정자와 의자 등도 만들어놓았다.
앞으로 이곳에는 빼곡하게 감나무를 심어 ‘씨 없는 곶감마을’이라는 마을의 이미지를 더 부각시킬 예정인데, 가을철 감이 열린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꽤 멋질 것 같다.
이러한 마을의 변화는 으뜸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본격화됐다.

당시 최명근(51) 이장은 학동마을만의 장점인 ‘씨 없는 곶감’을 브랜드화 하기 위해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마을에 있던 씨 있는 감나무를 모조리 잘라냈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을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최 이장의 설득에 마을주민들은 결국 마음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학동마을에는 더 이상 ‘씨 있는 감’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학동마을에는 3만주 가량의 감나무 묘목을 심었고, 앞으로 10만주까지 나무를 늘려갈 계획이다.
이 밖에도 휴양객 등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1만5천 평 가량의 감나무 단지도 조성할 예정인데, 앞서 얘기한 산책로 부근이 대상지역이다.

▲ 마을 약도
이 밖에도 마을에 있는 새로 지은 곶감 건조시설 역시 으뜸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이뤄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집에서는 높이 3m 정도로 건조시설을 만들었는데, 그렇다보니 건조도 시원찮았고, 맨 밑 부분에 달아놓은 곶감은 상해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다 최 이장이 5m 높이로 시설을 만들어 감을 말려보니 기막힌 곶감이 탄생했다. 하지만 너무 높아 사고 위험성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4m 높이로 건조시설을 만들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도 점차 곶감 생산에 대한 노하우를 갖게 됐다. 일반적으로는 10월에 들어서면 감을 깎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감이 너무 많이 말라 모양과 색이 형편없어 상품성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주민들은 감을 깎는 시기를 가능한 늦춰 서리가 내리기 전 감을 수확해 깎아 말리면 감이 제 모양과 제 색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뒤로 학동마을 곶감은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 됐다.
심어 놓은 묘목이 아직 다 크지 않아 감 수확량이 적기 때문에 곶감도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마을의 곶감은 대부분 팔려나가는데, 특히 올해는 이 마을이 한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면서 주문전화가 폭주했다. 하지만 이미 곶감은 모두 나간 상태였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감을 곶감생산을 위해 재배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마을의 관광자원화도 꾀하고 있다.
너무 많아 수확하지 못하는 감이 생긴다면, 도시민들을 초청해 감 따기 행사 같은 축제를 여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런 것은 모든 묘목이 다 자란 아주 나중의 이야기이지만, 이런 아이디어와 투자가 결국엔 지금의 자신이 아닌 나중의 후손을 위해, 그리고 나중의 마을을 위해 꼭 필요한 생각일 것이다.

▲ 최명근씨
요즘 최명근(51) 으뜸마을 추진위원장은 바쁘다. 머릿속은 온통 으뜸마을 가꾸기와 산촌종합개발사업으로 복잡하다. 이 사업은 현재의 자신이나 주민들은 물론이고, 10년이나 20년 후 마을의 주축이 될 후손들을 위한 사업이라고 생각하니 더 많은 신경이 쓰인다.
학동리 경계쯤에 있는 ‘씨 없는 곶감마을’ 사무실에서 최명근 위원장을 만났다. 마침 이 날은 이후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펜션시설 가스 설비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최 위원장은 일단 학동마을 ‘씨 없는 곶감’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골짜기 마을인 만큼 일조량도 부족하고, 농지도 넉넉하지 않아 논이나 밭작물 모두 신통찮은 게 마을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을은 다른 지역에 없는 독특한 것을 갖고 있죠. 그게 바로 씨 없는 곶감입니다.”

20여 년 전 젊은 시절부터 마을 이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최 위원장은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젊었을 때 ‘씨 없는 곶감’을 특화해 마을의 발전을 꾀했어야 한다는 후회다.
“나이를 먹으니까 점점 겁이 많아집니다. 몇 년 전 처음 으뜸마을 가꾸기로 씨 없는 곶감 사업을 추진할 때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열성적으로 일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조금씩 늙어가니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최 위원장은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할아버지들이 심어놓은 감나무에서 마을 사람들이 감을 수확했듯이, 지금 심은 감나무 묘목이 자라 나중에 후손들이 수확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게 최 위원장의 생각이다.

그래서 최 위원장이 생각하는 학동마을의 모습은 어디서나 감나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씨 없는 곶감’이라는 마을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은 물론, 곶감 생산 기반을 만들어 지금의 넘치는 곶감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다.
“산 넘어 완주군 동상면에서도 씨 없는 곶감을 생산합니다. 그런데 완주군은 곶감에 대한 투자가 엄청나요. 지금 우리는 5천 원 미만 포장재를 사용해야 하는 지원을 받고 있지만, 동상면은 1만3천 원짜리 포장재를 사용하고 있어요. 문제는 포장재 가격 차이가 8천 원이지만, 판매가격은 6~7만원 차이나 나요.”

최 위원장은 곶감의 품질이야 전국 최고를 자부하고 있지만, 포장재가 부실해 제값을 못 받는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 마을은 단합이 잘 됩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면 마을 주민들이 적극 따라줘요. 공동체라는 게 개인을 버리고 ‘우리’를 생각하면 가능하잖아요. 앞으로도 우리 마을은 주민들이 더 똘똘 뭉쳐서 우리 특산품 ‘씨 없는 곶감’을 더욱 특화시켜 나갈 겁니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