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영 신 서울타임스 회장

집념과 의지로 세월을 극복하여 오던 나는 때때로 체념과 그것의 달관된 길목에서 얹어져 가는 연륜에 또 하나가 낭패되어 쌓여지는 그 세월을 보면서 가끔씩 서러워 지는 지난날과 잊을 수 없는 또 한 개의 지난날 위에 무엇이 외로움이고 무엇이 그리움이고 무엇이 후회스러움인가 하고 가슴속에 쌓여있는 그 회한을 혼란스러워 할 때가 참 많다. 운명을 그렇게 핑계 하다가도 혹은 그것이 잘못 던져진 주사위의 사악한 작란 (作亂;난리를 일으킴. 장난의 잘못 쓰는 말)은 아닌 것인지 그것조차 혼돈스러워 할 때도 있었다.
참 어릴 적, 열 네 살 적 있었던 그 사건은, 그것은 한 인간의 한 평생에 그 운명을 바꾸는 그런 것 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것의 의미는 다름 아닌 운명의 갈림길 이였다.

그 갈림 길에서 사소한 사건 같았던 그 실수(失手:잘못 된 일.)가 인생의 실패(失敗:일이 목적과는 반대로 헛일이 됨.)로 연결되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허무함은 두고두고 가슴 속 깊게 반추(反芻)하는 의미로 그것은 한(恨) 바로 그것 이였다.
원래 아버지는 사범계열의 병설중학에의 지원을 원하고 계셨고, 담임선생님은 인문계열에의 지원을 고집하고 계셨으나 아버지의 의견이 우선 이였다. 아버지의 꿈은 페스탈로치 같은 그런 스승에의 길에 의미보다는 우선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이 보장된다는, 그리하면 어려운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길의 선택 이였고, 선생님의 욕심은 잠재하여 있는 이 학생의 특성을 살려서 이학생의 장래는 물론 이 학교의 위상을 세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선생님다운 그러한 주장 이였다.

후일담이야 어찌 되었건 아버지의 뜻대로 그 당시로는 여간 머리 좋은 아이가 아니면 가기 어렵다는 그 학교에 내신 성적 만점(滿點)과 함께 지원하는 절차를 마친다. 산골 소년, 꿈 많은 산골소년은 나름대로의 청운의 꿈과 주위의 주목을 받으면서 난생 처음 인구가 북적대는 도회지의 그 혼란 속에 예비소집을 거쳐 내일의 시험에 도전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오랜 친구에게 부탁하여 마련한 숙소의 하룻밤을 그렇게 뜬둥 만둥 보낸다.
그것은 똑똑한 아이를 너무나 믿었었던 아버지의 작은 실수였고, 그리고 그것은 한 아이의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큰 실수였다.
어제 예비소집을 마치고 학교에서 거의 4KM에 가까운 그 길을, 철도변을 따라서 그렇게 열심히 기억하며 눈여겨 두었던 그 길을 그야 말로 잘 못 간 것이다.

아무리 걸어도 건너야 할 한벽루의 징검다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천로변을 따라서 그렇게 한없이 내려간 길은 색장리라는 어느 조그마한 마을의 구멍가게 입간판을 보고서야 잘못되어가는 자신의 인생길을 내가 깨달은 것은 얼마나 지나서였다.
시험은 망쳐졌고 얼마 후 아버지는 한으로 멍 진 가슴의 응어리를 안으신 채 타계하셨고, 지금까지 그 아버지는 아버지의 그 작은 실수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후기 인문계열에 입학하여 이번에는 가까운 학교의 기숙사에 고향선배의 주선으로 숙소를 정하여 진학에 성공하였으나 그 사건으로 인한 내 인생의 수많은 시행착오는 무엇으로 채워 넣을 수가 없었음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았다.
전주의 서학동 남부다리 구 시장거리에 나가 보면 그 혼잡이란 여늬 어느 곳의 장터와 다름없었지만 1950년대 그때는 더욱 그랬다.

그 다리 밑에 상설 약장수의 공연장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가끔씩 한 달에 한 번씩 학비랑 기숙사비랑 어렵게 챙겨주시고는 상설공연장에서 공연하는 심청전, 춘향전, 또는 함평천지 늙은 몸이 어쩌고 하는 구성진 가락에 심취되고 하시는 동안 나는 페스탈로치가 되는 그런 꿈보다는 또는 나를 걱정하여 주셨던 담임선생님의 그 크고 고마웠던 마음보다도 아버지가 모처럼 마련하여 주셨던 100환씩 하였던 천변의 그 자장면으로 외식을 즐겼고, 그 맛이 지금도 이렇게 잊혀 지지가 않으니 어쩌면 애초부터 나는 어쩔수 없는 한심한 인생 이였는 갑다는 생각이 된다. 그 때, 그 곳엔 검정 굴뚝 모자를 눌러 쓴 도깨비 만큼이나 무서워 보이던 점쟁이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나를 불러 세우고 아버지에게 이른다.

「호식(虎食) 할 팔자여!」
「안당게, 그래서 당골레 한테 팔았당게로.」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냥 받아 넘겼고, 그 때서야 나는 내가 여수의 어느 무당에게 팔려 간 판쇠라는 또 다른 이름도 알았다.
그 날, 그 도깨비 할아버지는 내 사주를 읽어주면서 몇 번 씩이나 혀를 쯧쯧 차 댔지만 그 의미를 알지도, 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호랑이에게 물려 갈 팔자라는 것도,

들녘에 모닥불을 지펴놓고 길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불러 모으는역마직성(驛馬直星)의 팔자라는 것도,
싸리문 밖에 쌓아놓은 노적가리(한데 쌓아둔 곡식더미)의 그 의미도. 늦게 풀릴 팔자소관의 행운이 세 번씩이나 하늘의 별처럼 온 몸에 드리워 져 있다는 것도.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단기4288년이 서기1955년이였다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전철 우대권 한 장을 얻으려고 매표소 앞에 줄서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적 인가 있었던 전설 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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