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몰라도 인심은 우리가 최고”
“다른 건 몰라도 인심은 우리가 최고”
  • 점필정 기자
  • 승인 2007.03.02 2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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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2)
백운면 신암리(2) 임신마을(임하, 원신암)

지난주 백운면 신암리의 사라진 자연마을을 살펴본 데 이어 이번 주에는 반절어름(임하)과 원신암 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신암리로 향했다.
신암리는 한 주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한적했는데, 더 포근해진 날씨 덕에 곳곳에 있는 밭에서 주민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이 간혹 눈에 띈다.
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게 매우 맑다. 하지만,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이 ‘조만간 황사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 서구이재 도로를 타고 올라가 백운교에서 마을을 내려다 본 모습
◆반절어름과 원신암
지금은 반절어름과 원신암 두 개 자연마을을 합해 ‘임신 마을’이라고 부른다.
반절어름은 을림리와 반전리 두 개 마을을 합한 마을인데, 한자어 임하(林下)로 바뀌었다. 이 마을은 본래 전주 최씨 집성촌이었는데, 신암 저수지가 생기면서 지금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 마을에는 20가구가 조금 넘는다고 한다.
원신암은 ‘신암리의 원 마을’이라는 뜻인데, 광산 김씨가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과 장수군 천천으로 넘어가는 오계치로 가는 길에 있는데, 지금은 마을 주민들이 고향을 많이 떠나 10가구가 채 안 된다.
원신암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산은 느티나무를 가리키는데, 앞당산과 뒷당산 두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면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나 마을에 피해를 주거나 당산나무가 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당산나무가 고목이 돼 넘어가면서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다.

▲ 폐고 안 교실, 누가 더 써 놓았는지 낚서가 가득하다.
◆추억 가득한 폐교
두 마을 가운데 어느 마을부터 갈까 고민하다가 일단 가까이 있는 반절얼음으로 방향을 잡았다. 도로 옆 공간이 충분한 곳에 자동차를 세우고,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일단 마을회관으로 갔다. 하지만, 포근한 날씨는 노인들도 밖으로 이끈 모양이었다. 마을회관은 텅 비어 있었고 회관 옆에 있는 작은 가게도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우선 도로 왼쪽에 있는 한 폐교로 발길을 돌렸다. 폐교로 들어가는 짧은 오르막길 옆에 낡은 표지판이 보인다. 2003년 3월 1일자로 기록돼 있는 글귀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표지판을 지나쳐 올라가니 풀이 무성하게 자란 넓지 않은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했을 운동장 한쪽에는 칠이 벗겨진 교단이 보인다.

이어서 교실이 있는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열심히 닦았을 나무 바닥은 많이 낡아 있었고, 일부 부서진 곳도 있었다. 그리고 교실 안에 있는 칠판에는 빽빽하게 낙서가 돼 있는데, 누군가의 이름과 함께 ‘2003년 7월 27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학교가 문을 닫기 직전에 적어놓은 모양이다.
그렇게 학교를 둘러보고 다시 도로에 나오니 언덕에 있는 밭에서 한 남성이 일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 남성은 직장에서 퇴임한 후 자연을 벗삼아 작은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반절어름에 밭을 구해 일구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하고, 공기 좋고, 물 맑으니 여기 만한 곳이 없었던 모양이다.
“전주에 살면서 저만 가끔 이곳으로 와 밭을 일궈요. 마을에 관해서 물어보려면 저 아래쪽에 사는 노인을 만나는 게 나을 겁니다.”

▲ 임하마을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학구 옹.참전유공자증서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받은 감사패를 소개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
임하마을에서 급회전 구간 바로 전에 있는 왼쪽 골목길 끝.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한 마리가 시끄럽게 짖어대고, 한쪽에서는 구수한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집 마당에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최학구(86) 옹이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 마을? 사람이 참 많았던 동네야. 한 70가구가 살았지. 저 위 분교에 학생이 137명까지 있었어. 학생이 150명이 되면 본교가 될 수 있었는데, 몇 명 모자라서 분교로 남았다가 계속 학생이 줄어 문을 닫았어.”
특히 최 옹은 이 마을이 인심 좋기로 유명했다고 설명했다. 집집마다 대문은 물론 담장이 없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가 길가에 쌀가마를 쌓아 두어도 자기 것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는 게 이 마을이라고 최 옹은 말했다.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듣다가 최 옹의 개인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가자, 최 옹은 기자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 들어서니 먼저 벽에 걸린 ‘참전유공자 증서’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최 옹은 고이고이 간직해두었던 감사장 하나도 꺼냈다. 자세히 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 3주년을 맞아 민주화와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한 데 대한 고마움으로 최 옹에게 전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 때문에 청와대도 몇 번을 갔어.”
최 옹은 젊어서부터 열혈 청년으로 마을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이어달리기 선수였는데, 줄곧 첫 주자를 맡아 초반에 다른 팀과의 거리를 크게 벌리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말미였던 1945년 1월에 일본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옳지 않은 일이라면 일본인들을 흠씬 두들겨 팰 정도였다. 게다가 한국전쟁 당시에는 빨치산을 맨손으로 사로잡을 정도였고, 또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야당 편에 서서 독재 정권과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온 최 옹에게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 가슴 깊이 새겨 있었다. 공부도 잘했고, 도 대표 축구선수로 활약할 만큼 운동도 잘하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교 졸업 후 입대했는데, 북한산에서 삐라를 수거하는 일을 하다가 실족해 실종됐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최 옹의 눈시울이 촉촉해지면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최 옹은 아들과 며느리의 효도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해병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입학한 손자 얘기를 꺼낸다. 손자 역시 최 옹처럼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는 열혈 청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 옹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최 옹은 “사진을 크게 뽑아 달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신 “최 옹이 실린 신문을 가져다 드리겠다.”라고 약속했다.
취재를 마치자 최 옹이 “다음에 올 때는 꼭 점심밥을 여기서 들라.”라고 하면서 배웅한다.

▲ 황옥연씨가 집 앞 텃밭을 정리하고 있다. 이른 봄 때문에 할 일이 더 많아진 것 같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최 옹과 헤어지고 마을회관 쪽으로 가보니 도로 옆 텃밭에서 한 여성이 일을 하는 게 보인다. 인사를 하자 활짝 웃어 보이며 반가움을 나타낸다.
“고향은 장수군인데, 여기로 22살 때 시집왔지. 그러니까 딱 50년 됐네.”
황옥연(72)씨는 점심도 거르고 텃밭에서 비닐 하우스 철골 해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원래 남자들이 해야 하는 일인데, 마을에 사람이 없어 어디 부탁할 곳도 없다고 한다.
왜 자식들과 함께 살지 않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환갑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혼자 된 지 15년이 됐는데, 혼자 있는 게 편해. 그리고 이 마을이 공기 좋고 물도 맑아서 살기 좋아.”
황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번에는 원신암 마을로 향했다. 마침 가는 길 한쪽에서 포도 묘목을 손질하고 있는 한 주민이 있었다.

“제가 포도를 먹고 머리 아픈 게 나았어요. 그래서 심어야지 하다가 지난해에 심고, 지주대를 세우는 거예요.”
유정애(53)씨는 도시에 살다 어머님이 편찮아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일을 시작했는데, 돈도 안 되고 참 힘든 게 농사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나마 자녀가 공부를 마쳤기 때문에 다행이란다.
“기자님. 신문에 내려면 저 위쪽 다랑이 논 얘기 좀 해주세요. 경지정리가 안 돼 있어서 기계를 쓰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기자에게 문제가 생겼다. 간신히 유씨를 설득해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사진기가 고장 나 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유씨에게 인사하고 다시 원신암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방금전 유씨가 얘기한 논을 바라보니, 경지정리가 안 돼 기계를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만큼 농사 효율이 떨어지고 소득이 줄면 농민은 결국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으니, 행정기관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데미샘은 골칫거리?
원신암 마을로 들어선 후 마을회관 앞 공터에 자동차를 세웠다. 지난주 데미샘을 가기 위해 지나쳤던 마을이라 이제 익숙하다. 이곳 마을회관 역시 아무도 없었다. 대신 마을 골목에서 마을 주민과 만날 수 있었다.
17살에 남원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형복구(77)씨. 낯선 이를 따뜻한 미소로 환영해주었다.
이 마을에서만 60년을 살았으니, 형씨에게도 옛 추억이 가득했다.
“지금은 몇 집 안 살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 마을에 버스가 다녔는데, 버스에 마을 사람들이 가득 차서 나가고 그랬어.”
이 마을 역시 대문이나 담장이 없다. 담장이라야 나지막한 돌담인데, 젊은 사람은 손도 대지 않고 뛰어 넘을 높이다. 그만큼 이 마을 인심이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다.

▲ 임신마을에는 얕은 돌담과 흙집이 많은데, 그 모습이 참 정겹다.
“생전 대문 없이 살았어. 마을 사람들이 서로 믿고 아끼기 때문에 필요 없지.”
그러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물에 대해 물었다.
“예전에는 저 물을 마셨는데, 지금은 휴양객들이 버린 쓰레기로 물이 더러워져서 못 마셔.”
휴양객들은 어딜 가나 골치다. 요즘은 모두 자가용 자동차가 있어 먹을 것을 모두 싸오기 때문에 우리 고장에서 돈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조용히 돌아가지 않고 쓰레기를 버려두고 간다는 것이다. 그 덕에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맑은 물은 추억이 돼 버렸다.
지나가던 한 주민이 한마디 거든다.
“데미샘? 그거 골칫거리야.”

또 이 주민은 휴양객들이 자동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데미샘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가 오가면서 먼지가 많이 나 주민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형복구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을 몇 곳을 둘러보았다. 마을 앞쪽 언덕에는 젖소를 키우는 비교적 큰 규모의 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축사에서는 화물차 한 대가 계속 들락날락하는데, 짐칸에 두엄을 실어 마을 곳곳에 있는 논밭으로 실어 나르는 모양이었다.
여느 해보다 빨리 봄이 찾아오는 만큼, 주민들의 생활도 한 박자 빨라진 느낌이다. 다만, 지난겨울이 춥지 않아 농사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는 신암리 대전 마을과 유동 마을을 취재할 차례다.
아차! 아까 최학구 옹과 약속한 신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진이 잘 나왔어야 할텐데.’라는 걱정과 함께 다음 주를 기약하며 마을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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