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정창태
정 창 태 씨
정천면망화리이포출신
대성설비공사 대표
재경망화리향우회 총무
재경진안군민회 재무간사

운장산 지는 해를 내 가슴에 묻어 둘가/정자천 푸른 물에 노을 지면 뜨던 달/님이여/물 속에 잠긴/내 고향을 아시는가/이랑엔 호미질 소리 들머리 두레소리/갈용에 망화 모정 봉학 월평 내 고향이/그 언제/복사꽃 피면/우리들을 반기실까/문전옥답 웃던 얼굴 그 서당도 간데없고/신단 앞 고운사람 신들인 춤사위까지/이제는/가고 없어라/말이 없는 저 하늘/대목재 넘으면서 고남이재 넘으면서/새봄엔 갔던 제비 제품에 돌아오듯/헤어져/기쁜 만남을/기약하던 님들이여/우리우리 흩어져서 강 건너 산 너머에/용담에 용이 놀 듯 기개 높게 살다가/어느 날/다시 모여서/옛날 얘길 나누세나.

용담 호를 한바퀴 삥 돌아서 정천면 망향의 동산 탑 앞에 서 보면 정천 사람들은 누구나 참배하듯 엄숙한 자세로 발길을 멈추어 선다. 그리고 거기 적혀있는 망향가(望鄕歌)의 가락에 맞추어 꿈속에서처럼 그들의 고향을 찾아서 향수에 젖는다. 그리고 한참씩 그들은 저 용담 호에 묻혀있는 자기 집의 뒷동산 이거나, 앞 냇가이거나, 또는 앞마당 가의 배나무며 고염나무, 장독대 옆의 국화꽃, 봉숭아꽃, 복사꽃, 살구꽃들, 그렇게 그들은 지금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생생하게 그것들을 기억하면서 머릿속에 정리 해보는 버릇들이 언제부터인가 생겼다. 정창태씨도 거기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1980년 그가 다니던 안천고등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부산으로 직장을 찾아서였다.

1961년 그는 아버지 정갑준씨와 어머니 전옥례씨의 8남매 중(4남4녀) 막내로 태어난다. 중농의 집안의 일꾼을 둘씩이나 부릴 수 있었던 생활에는 그렇게 어려움 모르고 자랄 수 있었던 환경 이였으나 그의 마음에는 일찍부터 농사 일이 자신에겐 적합한 직업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고 술회한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그렇게 자신 있게 떠나왔던 고향에 대한 심한 향수의 정에 빠져 있기도 하였지만 그가 갖고 있었던 우직 할 만큼의 끈기로 넉넉히 그것을 이겨 낼 수 있었단다. 객지 생활의 시작이고 워크샵정도의 기본으로 제반 요령과 자취생활의 숙달로 그렇게 이겨갔다.

이렇게 부산 대우실업에서의 1년은 그의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기초 과정 이였지만 어린 나이의 그의 객지생활이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꿈속에서 만났던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들의 생각으로 자신도 모르게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면서는 내가 왜 이렇게 혼자서 객지로 떠돌면서 그리움에 젖어 있어야 하는가 하고 한탄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금방의 생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이겨 나갔다.
그는 집안에서는 막내였으나 사회에서는 막내 같지 않게 꿋꿋하게 잘 적응하고 잘 이겨 나갔다. 정창태씨가 부산의 대우실업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서의 본격적인 객지생활을 결심하고 상경한 것은 그 이듬해였다.
관악구 신림동의 특정 열관리기자재시공업체인 대성설비의 현장 인부로서 그가 취업하여 20여 년간의 그 생활에 적응하여 한 번도 현장의 변동 없이 한 우물을 파듯 살아 올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우직(愚直)함 이였다고 소리 내여 웃어댄다.

그렇게 2002년에는 자신이 20여 년간 자신의 생활 터전 이였고 희로애락으로 자신의 터전 이였던 그 대성설비공사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야기 한다. 성공이 별것인가. 자신이 하고 싶어 자신의 생존경쟁의 이 싸움터에서 자신의 적성을 맞추어 30여년의 그 세월을 한 길로 쌓아 내 사업체로 이루었으면 이것이 성공이 아니겠는가하고 말한다. 더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하고 그는 반문한다.
그가 인부 시절이거나 지금 사장이 되었거나 아무런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을 내조해 온 그의 아내 김옥이(전남광주.43세)씨와 자랑스럽지 못한 아버지 일수도 있는 것을 그렇게도 존경하는 모습으로 탈 없이 자라 준 두 아이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란다.

우리의 고향사람 정창태씨.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보통스런 인간의 삶이 이렇게 아름답게 성공할 수 있다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한길을 달려가며, 욕심 없이 노력하는 그 모습의 일상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우리에게 교훈으로 배워주었다.
(정창태H.P:011-288-4412)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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