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4]
성수면 좌산리 (1) 상기마을 상촌

▲ 상촌마을 전경. 좌산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 답게 산 경사를 따라 가지런히 마을이 펼쳐져 있다.
좌산리는 예전 진안군 일서면 지역이었다. 왼쪽에 와우형(蝸牛形) 명당이 있다고 해서 좌산리라고 했는데,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근 마을을 묶어 성수면에 편입됐다.
현재 이 마을은 원좌산, 하가수, 상가수, 중기(중터), 송촌(송기), 상촌 등의 자연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원좌산은 그대로 행정리로 남았고, 상가수와 하가수는 ‘가수’, 중기와 송촌, 상촌은 ‘상기’라는 행정리로 묶였다.
이번 주에 찾아간 상기마을 상촌은 좌산리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로 좌산리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 이 마을은 전주 최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졌는데, 본래는 뒷산 지세가 활과 같아 ‘활 안쪽이라는 뜻’으로 ‘내궁(內弓)목’이라고 불렸다.
한때는 30가구 정도 되는 작지 않은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 11집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노인 부부나 혼자 사는 노인이 대부분이어서 현재 인구는 30여 명이다.

▲ 상촌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 왼쪽부터 심규순, 이이순, 최영순, 이복례, 구양현, 김종섭, 김금예씨. 마을회관이 없는 만큼 이들 주민들이 모이는 곳이면 곧 마을회관이나 다름없다.
◆유명했던 곶감 대신 고추 유명세
햇볕이 따뜻했던 13일 오후. 논과 밭에는 추위에 잠시 일손을 놓았던 농민들이 한 해 농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삼밭에서는 지주목을 세우고 차광막을 씌우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방금 객토를 한 것처럼 보이는 밭에서는 돌을 골라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좌산리에 접어들어 가수마을 방향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상기마을이다. 상기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은 중기와 송촌이 있는 곳. 지도에서 본 대로 도로를 따라 계속 나아가면 상촌이 나온다. 버스정류장에 적힌 마을 이름이 ‘이곳이 상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을에 들어서면 ‘참 깨끗하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예전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비교적 일찌감치 주택개량사업을 벌였고, 10여 년 전부터 집집이 흙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람이 떠나 빈집은 바로 허물어 정리가 되면서 마을에는 빈집이 거의 없다.
이런 깨끗한 마을의 이미지와 더불어 곳곳에 보이는 고목이 잘 어울린다. 족히 100년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인데, 전부 감나무라고 한다.
지금은 잎이 하나도 없어 가지만 앙상해 보이는데, 가을만 되면 굵고 맛좋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단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에 노인들만 남아 감을 딸 수가 없다고 한다. 수령이 많은 만큼 키도 커서 나무에 오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을에서 젊은 축에 끼는 구양현(68)씨 정도만 나무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곶감이 차지하던 자리는 이제 고추가 차지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조금이라도 고추농사를 짓는데, 일교차가 높은 산골마을의 기후가 고추를 더 맛있게 만든단다. 이런 맛있는 고추는 어느새 소문이 나서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 마을로 고추를 사러 직접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는 감나무. 가을이면 맛있는 감이 주렁주렁 열린다.
◆물이 귀한 마을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나지막한 비닐하우스 앞에서 김종섭(78), 김금예(70)씨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하우스 안에서 기르고 있는 고추모 소독을 하고 있었다.
김씨 부부는 모두 상촌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김종섭씨가 한국전쟁까지 참전하고 7년 만에 제대하면서 결혼하게 됐단다. 지금 자녀들은 모두 장성해서 도시로 나갔고, 부부는 조금씩 농사를 지으며 알콩달콩 살고 있다.
“우리 마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물이 제일 중요해요. 옛날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세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떠다가 생활했어요.”

김금예씨는 처녀 시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떠 나르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 당시 아녀자들은 한겨울에 눈이 무릎까지 차일 정도로 많이 내려도 계곡까지 가서 얼음을 깨서 물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농사철에는 물이 부족하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마을에서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내동산에서 ‘우제(雨祭)’를 올렸다고 한다.
“그때 물동이를 이고 가다가 동네 총각들과 마주치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그때는 연애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죠.”

김금예씨의 말에 김종섭씨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아마도 결혼할 당시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저쪽에 있는 저수지는 일제 강점기 말에 만들었어요. 그런데 조그맣게 만들어서 저수량이 많지 않아. 물을 한참 써야 할 때는 논밭마다 물을 가두느라 난리예요.”
김종섭씨의 말에 김금예씨가 “저런 건 더 크게 만들어주면 안 되나?”라고 호응한다.

▲ 일본에서 시집온지 10년 됐다는 산아소자씨와 남편 김상대씨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아래쪽 고추 하우스에서 일을 마친 구양현씨가 찾아왔다. 김금예씨는 구씨를 ‘마을의 일꾼’이라고 했다.
“이 양반이 농기계가 있어서 노인들 농사 지을 때 많이 도와줘요.”
“아니. 일꾼은 아니고, 그냥 서로 품앗이 하는 거죠.”
김금예씨의 칭찬에 구양현씨가 고개를 흔들며 부인한다.
“저기 높은 감나무 있잖아요. 가을에 한 번 와봐요. 가을이면 저 양반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감 따는 거 볼 수 있으니까. 나무를 얼마나 잘 탄다고요.”

김금예씨의 연속 칭찬에 구씨는 그냥 “허허”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따뜻한 햇볕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번에는 구씨의 부인 최영순(64)씨와 심규순(74), 이이순(75), 이복례(74)씨까지 모여든다. 사람들이 모여 있어 혹 재미난 일이 있을까 싶어 왔다고 했다.
“아침에 텔레비전 봤어? 아니 구십 먹은 노인네가 귀도 밝고, 농사도 짓더라고.”
심규순씨가 아침 방송에서 본 이야기를 꺼내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봤다며 이야기를 더한다.
“부인은 여든이 넘었는데도 두 번 만에 바늘 귀에 실을 꽂더라고.”(김금예)
“그 구십 먹은 노인네는 술, 담배도 안 한데요.”(이복례)
“늙더라도 건강하게 살다가 가야지.”(구양현)

▲ 상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남순씨. 요즘에 몸에 힘이 없어 걱정이 많다.
◆맷돼지를 잡아야해
주민들은 마을 길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야생동물 때문에 농작물 피해를 입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대책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지난해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하나도 못 건졌지 뭐예요.”
구양현씨의 말에 다른 주민들도 피해를 봤다고 얘기했다. 이건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맷돼지 밥을 준 격이 됐다며 혀를 찬다.
“노루(고라니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피해도 커요. 콩 같은 것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니까요.”(이이순)
“노루, 너구리 말도 못해요.”(김금예)

◆상촌 최고령 이남순씨
이야기를 나누던 주민들이 아래쪽을 가리키면서 가보라고 한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고 한다.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얼른 노인에게 다가가서 인사부터 했다.
“어디서 왔어?”
올해 86세가 된 이남순씨. 방금 빨래를 한 뒤 산책하러 나왔다가 사람들이 모여있어 오는 길이란다.
노인과 함께 다시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오니 심규순씨가 “뭐 재미난 일이 있는 줄 알고 오나 보네.”라며 웃는다.

“이제는 힘이 들어서 밥하고 빨래하는 게 쉽지 않아. 이제 아들네로 가야할 것 같아.”
이남순씨는 아홉 남매를 뒀다고 한다. 모두 직장을 얻고 결혼해서 도시로 나가 사는데, 이씨는 그냥 상촌이 좋아 자식에게 가지 않고 혼자 살았단다.
“예전에 우리 마을에도 마을회관이 있었는데, 낡아서 허물고 광장으로 만들었어요. 사람들도 없고 해서 필요도 없었고.”(김종섭)

상기마을 세 개 자연마을에서 마을회관이 있는 곳은 중기이다. 그런데 걸어서 가려면 20분은 족히 걸리기 때문에 이곳 상촌 사람들이 그곳까지 가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이이순씨 집에 모이는 일이 많단다.
이날도 이이순씨 집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이이순씨 집 마당에서 불을 피워 감자를 구워먹으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귀농인 김우식씨. '신농업인'이라는 꿈을 꾸며 매일매일 열심히 일한다.
◆인삼 귀농인 김우식씨
마을 맞은편 산 언저리 인삼밭에 지주목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저는 귀농했어요. 그런데 농사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네요.”
송촌에 살고 있다는 김우식(48)씨는 3년 전 전주시에서 귀농해 농사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상촌에 밭을 얻어 인삼씨를 뿌리고, 올해 차광막을 씌우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친구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인삼이 좋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보니까 투자도 많이 해야 하고 손이 많이 가네요.”
힘들다고 하면서도 김씨의 표정은 밝다. 도시에 살면서도 맑은 공기와 건강한 흙냄새를 많이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귀농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생계 문제일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인삼을 하다 보니까 5~6년을 계속 수입 없이 투자만 해야 하는데, 그렇다 보니 생계는 물론, 아이들 교육하는 게 가장 큰 걱정입니다.”
나이가 들어 노년을 보내려고 귀농하는 경우와 다르게 생계 수단으로 농업을 선택한 만큼, 김우식씨는 마음이 다급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는 것이 있어 그 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었다.
“처음 귀농하면서 본 게 있는데요. 진안 인삼을 홍보하는 거였는데, 한 노인이 인삼을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 있잖아요. 나중에는 내가 그 사진의 주인공이 돼서 ‘신농업인 김우식’이라는 진안 인삼 홍보물을 찍는 걸 꿈꾼답니다.”

▲ 김종섭씨가 하우스 안 고추모를 소독하고 있다. 올해도 고품질 고추가 기대된다.
◆걸러도 걸러도 돌
마을에서 도로 건너편 밭에 한 부부가 일을 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손으로 무언가를 계속 골라 내는데, 자세히 보니 돌이다. 밭 곳곳에는 골라낸 돌이 무더기로 있었다.
“지난해에 고추농사를 지으면서 한 번 골라냈는데, 또 돌이 나오네요.”
김상대(44)씨와 일본에서 김씨에게 시집온지 10년이 된 산아소자(45)씨. 올해도 고추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기계를 가져다 밭을 갈기 전에 이렇게 돌을 골라내야 기계가 고장나지 않는단다. 1주일이 넘도록 계속 돌을 골라내고 있는데, 하루만 더 하면 끝날 것 같다고 했다.

“상촌은 아랫동네(중기, 송촌)와 토질이 다른가 봐요. 아랫동네는 콩이 안 된다고 하는데, 여기는 콩이 잘돼요. 그리고 아랫동네에서 고추가 병들어 난리일 때도 여기는 괜찮았어요.”
사진 한 장을 찍고 난 뒤 김씨 부부는 계속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올해도 분명, 이 밭에서 자란 고추는 맛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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