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5
성수면 좌산리 (2) 상기마을 중터, 송촌

 

▲ 상기마을 표지석 부군에서 바라본 중터. 지금은 열 가구 남짓만 마을에 살고 있다.
성수면 좌산리 상기마을은 중터, 송촌, 상촌 세 개 마을로 구성된 행정리다. 이 가운데 중터와 송촌은 한 마을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깝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는 두 자연마을은 서로 돕고 의지하며 올 한 해 풍년 농사를 준비하느라 매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20일 오후에 찾아간 중터와 송촌. 비교적 넓은 농경지를 끼고 있는 두 마을은 언뜻 보기에도 부자가 많이 살았을 법한 곳이다. 주변의 높지 않은 산 역시 곳곳에 농작물을 재배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놀리고 있는 밭이 많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낮은 산에 일궈놓은 밭에서는 주민들이 농사일에 한창이었다.

▲ 조뜸 근처에서 바라본 송촌.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많아 잘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서흥 김씨 정착한 마을
중터는 서흥 김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진 마을로, 일서면 중앙에 있다고 해서 ‘중터’ 또는 ‘중기’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대 정도를 이어왔다고 하니 상당한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이런 역사를 말해 주는 듯, 상기마을 입구에는 서흥 김씨의 입향조를 기록한 커다란 비석이 우뚝 서있다. 또, 중터에는 서흥 김씨가 모여 제를 올리는 제실이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송촌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소나무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예전에는 솔밭뜸이라고 불렸다는데, 지금은 소나무가 많지 않다.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땔감으로 소나무를 많이 베어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간히 보이는 소나무는 매우 보기 좋은 모양을 하고 있어 예전의 아름다웠던 소나무숲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마을은 지금도 서흥 김씨 일가가 구성원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이름은 다르지만 한 마을이나 다름없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중터와 송촌 모두 각각 열 가구 남짓에 사람은 스무 명 안팎이다. 함께 상기마을에 속한 상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 송촌에는 40~50대 연령의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비교적 잘 사는 마을로 통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농작물은 고추와 벼, 그리고 최근에는 인삼 재배면적이 많이 늘었다.

▲ 송촌에서 만난 김기천(오른쪽), 유미숙 부부. 버섯재배사에서 표고 버섯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송촌의 일꾼 김기천씨
두 마을 가운데 송촌 마을을 먼저 찾았다. 농기계 보관 창고와 정자가 있는 마을 광장에 자동차를 세우자 한 주민이 관심을 보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지난주 신문에 친구가 나왔다며 반가워한다.
마을에서 젊은 농군이자 일꾼으로 꼽히는 김기천(48)씨다. 김씨는 차나 한 잔 하자며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에서는 부인 유미숙(42)씨가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주 신문에 우식이(김우식씨)가 나와서 안 그래도 신문사로 한 번 연락하려던 참이었어요.”
김기천씨는 지난주 송촌에서 만난 김우식씨의 귀농을 주선했다. 그리고 김우식씨의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뭐 도와준다는 것보다 서로 일손이 필요할 때 품앗이를 하는 것뿐이죠.”
그러면서 김기천씨는 귀농인들을 위한 행정기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군이 귀농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관심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책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보장돼야 귀농인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으니까요.”
이어서 김기천씨는 농민들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지원책 마련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에서는 작목반이다 뭐다 해서 조직이 만들어지면 지원을 해주는데, 사실 농사짓기 바쁜 사람들이 어떤 단체를 만들고 활동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군이 수시로 현장을 찾아와 농민들의 고충과 요구사항을 청취해서 지원하는 더 적극적인 행정이 필요합니다.”
3년 전부터 김기천씨는 인삼을 시작했다. 20년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최근 인삼·한방특구를 비롯한 군의 인삼 관련 사업이 진행되면서 뛰어들었다고 한다.

“저는 홍삼쪽을 생각하고 있는데, 최소 5년근 이상은 돼야 하잖아요. 그런데 농가에서 5년간 수입을 올리지 못하면서 투자만 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인삼에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 김기천씨는 단기적인 자금조달을 위해 표고버섯과 고추, 벼를 함께 재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기업처럼 농사를 짓고 있는 것 같다.
“농사도 기업처럼 해야 경쟁력을 얻을 수 있어요. 장기적인 것과 단기적인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에 군의 지원만 뒷받침된다면 농사도 할 만할 겁니다.”

▲ 중터 마을광장에서 농기계를 손보고 있는 김옥득씨.
◆중터의 일꾼 김옥득씨
송촌에 김기천씨가 있다면 중터에는 김옥득(63)씨가 있다. 이윤순(58) 부녀회장의 남편인데, 젊었을 때는 새마을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옥득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경력은 마을금고를 만들어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 것이다.
70년대 이전까지 중터에서는 마을 논밭의 대부분을 가진 부잣집의 소작농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생활형편이 좋지 못해 집집이 빚이 많았는데,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김옥득씨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조직했던 계를 새마을금고로 전환해 주민들의 재정적인 부분을 하나씩 해결해주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마을금고 이사장을 맡아서 일했는데, 마을금고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죠.”

이후 중터는 인근지역에서 부농마을로 꼽힐 정도로 잘 사는 마을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 둘 도시로 떠났고, 현재는 노인 가구가 대부분이다.
“옛날이 좋았죠. 없이 살았어도 인정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는데.”
김기천씨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변화와 개혁, 발전을 만들어가던 예전을 생각하면 자부심을 느낄만도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인구가 줄어드는 마을의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지금 중터에는 남자가 네 명뿐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김기천씨가 가장 젊다고 하니 김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마을의 효부와 효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효부, 효자비
◆전설 흐르는 상기마을
상기마을 중터와 송촌에서는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몇 가지 전설이 주민들 입에 오르내린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기 때문에 그만큼 이야기도 많이 간직한 모양이다. 일단 많이 알려진 전설부터 소개한다.
먼저 ‘조뜸전설’이 있다.
송촌마을 뒤쪽으로 농로를 따라 골짜기 방향으로 올라가면, 산소 몇 기를 끼고 있는 논밭이 나오는데 이곳이 ‘조뜸’이다.
이곳은 예전에 조씨가 경작하던 논이었다. 그런데 조씨가 성격이 포악해 한 번은 시주를 부탁한 스님을 대틀에 매면서 행패를 부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한 노승이 마을에 찾아왔는데, 노승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을 직선으로 내면 좋을 거라고 해 마을에서는 이 말을 따랐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조씨가 망하면서 그 뒤로 마을에서는 이곳을 조뜸이라고 불렀다.

다음 전설은 장군바위 전설로 상촌과 중터에서 전해진다.
좌산리에서는 지금의 내동산을 ‘백마산’과 ‘내동산’으로 나누어 불렀다. 오른쪽에 바위가 많은 산이 ‘백마산’이었다.
전설은 대략 이렇다. 옛날 송씨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우물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기는 날갯죽지가 있어 공중에서 날고 있었다. 송씨 부인은 이런 기이한 일이 있으면 역적으로 몰려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겁이 많이 났다. 그래서 아기의 날개를 잘라버렸는데, 아기는 이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백마산에서 백마가 화살을 물고 중터에서 상촌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로 뛰어내려 그 바위에 말발자국과 화살촉 자리가 새겨졌는데, 이 바위가 장군바위다. 이 백마는 다시 뛰어 좌산 말바위 구석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장군바위는 도로를 내면서 포장해버려 지금은 볼 수 없다.

▲ 중터와 송촌에 단 두 개만 남은 동자석. 예전에는 아들을 낳게 해준다고 믿었다.
◆아들 낳게 해주는 동자석
중터와 송촌에서는 옛 흔적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마을 곳곳에 있었다는 동자석이다. 구한말에 마을에서 동자석 10여 개를 세웠다고 하는데, 도둑맞고 잃어버리면서 단 두 개만 남아 있다. 두 동자석은 중터와 송촌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상촌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서 볼 수 있다. 예전 중터에서는 이 동자석이 아들을 낳게 해준다고 믿어 결혼한 여성 주민들이 기도를 올리기도 했단다.

다른 하나는 방앗간 흔적이다.
예전 중터와 송촌 사이를 흐르는 내에는 물방앗간이 있었다. 넓은 뜰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꽤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갔을 거라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언젠가 이 물방앗간에 불이 크게 나면서 결국 방앗간을 운영하던 사람은 마을을 떠나 임실로 갔다고 한다.
또 마을에는 돌방앗간도 있었다. 송촌 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건물이 사라지고 방아로 사용했던 커다란 돌만 덩그러니 도로 옆에 놓여 있다.

◆꽃 따라 전국 누비는 부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한 하우스 시설에서 나무상자를 정리하고 있는 김정관(54)씨를 만났다. 이 나무상자는 벌통으로 사용할 것인데, 부인 김숙자(50)씨는 예전 마을회관으로 사용했던 창고에서 새 벌통에 밀랍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른 봄 제주도 유채를 시작으로 아카시아꽃, 감꽃, 밤꽃, 싸리꽃을 거쳐 9월 중순 강원도 메밀꽃까지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는 게 양봉 일이죠. 그런데 요즘에는 기후가 변해서 그런지 꿀이 나지 않아요. 지금은 아카시아꽃이 피는 한철만 이동한다고 보면 돼요.”
김정관씨에게 양봉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가업이다. 사실 김정관씨 부부는 전주에 거주하면서 벌을 키우고, 봄부터 전국을 돌며 벌을 친다. 하지만, 이런 활동반경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자신의 고향이자 부모님이 계신 이곳 중터다.

▲ 중터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양봉을 하고 있는 김정관씨.

“30년 된 아카시아 나무에서 꽃이 피면 꿀 한 말을 얻을 수 있어요. 수익으로 따지면 100년 된 리기다소나무보다 훨씬 높아요. 아카시아 나무가 쓸모없다고 많이 베어내는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아카시아꿀이 유명하거든요. 양봉을 농가 소득원으로 고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올해 김정관씨 부부는 중터에 3단으로 벌통 120개를 놓을 예정이란다. 중터 인근에는 밀원(벌이 꿀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산과 들에 있는 온갖 꽃에서 벌이 채취한 꿀, 즉 잡꿀(?)만 나온단다. 다만, 얼마전 군에서 내동산 부근에 밀원을 조성한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벌이 꿀을 찾기 위해 멀리 내동산 너머까지 날아가요. 매우 비효율적인 거죠. 하지만, 내동산에 밀원만 조성된다면 벌통 1단 100개 기준으로 하루 한 드럼을 채취할 수 있어요. 농가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새 수입원이 될 수 있습니다.”

 

 

 

 

▲ 예전 물레방앗간이 있던 자리. 지금은 불타서 없어졌다.
▲ 중터에 정착해 마을을 이룬 서흥 김씨 입항조를 기록한 비석. 상기마을 입구에 당당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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