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최 춘 상
최 춘 상 씨
정천면 망화리 이포 출신
(주) 태흥전자 대표
모정초등학교제14회동창회장
재경정천면향우회 부회장
재경진안군민회재무담당이사

송나라의 대 유학자 염계선생이 말하기를 교묘한 사람은 말을 잘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말이 적고, 교묘한 사람은 늘 수고롭고, 어리석은 사람은 늘 편안하고, 교묘한 사람은 도둑질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덕이 있고, 교묘한 사람은 불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행복하다. 아, 아, 참으로 세상이 어리석으면 형벌과 정치가 잘 다스려질 것이니, 윗사람은 편안하고 아랫사람은 잘 순종하고, 풍속은 깨끗하고 나쁜 폐단은 없어 질 것이다 하였다.
요즘 재주 좋은 사람들이 들으면 참으로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웃어넘길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최춘상씨는 어릴 적 서당 훈장님께 들었던 이 이야기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안고 살아간다.
흐르는 물의 깊이를 짐작 하는 것은 그 물결이거나 그 흘러 내리는 소리로서 가능하다. 잔잔한 물결로 또는 넘나드는 세 찬 파도 같은 모양새로 물 깊이를 재어 본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사람, 그러나 있어야 할 곳에는 항상 있었던 사람.
최춘상씨. 경주최씨 관가정파 31대손.

의리 하나와 고지식한 처세 하나로 이 사회의 험한 바람과 맞서 온 그의 평생이다.
그가 고향에서 모정초등학교와 용담중학교를 졸업, 농사를 거들으며 뻔한 집안사정의 그 의미를 일찍 깨달은 것은 항상 당시 농촌의 어려움에 3형제 중 둘째였던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이 어려운 농촌에서 비젼 없는 허송세월은 더 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을 알아 낸 것은 얼마 후의 일이였다. 전남 광주의 인척을 찾아서 그가 출향을 결심, 그 곳의 한 한약방의 종업원으로 일년을 터득한 그는 자신의 학력으로의 도전에 한계를 깨닫는다.
자신에게 넘치지 않는 자신의 길은 무엇일가, 그는 며칠을 그렇게 앞날의 자기를 생각하고 결론에 달한다. 고향에 있을적이나 항상 그가 눈여겨 생각했던 IT분야에의 도전이다. 이렇게 그는 R.T.V 학원 1년간을 수료하고 방위16개월의 의무도 마치는 야무진 출발을 시작한다. 대한전선 써비스 쎈타에서2년, 세운상가 대우전자에서 2년, 태양전기(영상, 음향기기부문)에서의 10년을 오직 그는 한 우물을 파는 미련하고 고지식한 그런 세월을 보냈다고 그는 회고한다.

6살에 여윈 아버지의 잊어지려는 모습을 그는 한사코 자신의 머릿속에 간직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하마터면 잊어지려는 고향으로 향하는 향수의 몸부림 이였음을 그는 강조한다. 가난해서 떠나 온 그 고향이 그렇게 아쉽게 추억으로 다가 오는 것은 고향이 비록 박토였어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 이였다고 강조한다.
1976년 어머니의 극성에 따라서 진안읍 운산리 출신 동인순씨(54세)와 결혼하여 1남2녀의 부모로서 우리보다 덜 가난한 아이들의 앞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이지만 그는 지금도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시집와서 30여년을 고생하며 반려해 준 아내에게 향하는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는 마음을 보낸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I.M.F시절, 누구나 그러하였듯이 그는 그때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괴롭게 회고한다. 도망자들을 찾아서 전국을 헤매던 그 기억도, 빚쟁이 도망자를 추적하여 겨우 찾아 낸 그들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쌀 몇 되박과 라면상자를 들이밀고 도망치듯 떠나오던 그날의 아품을, 지금 그는 잊지 못한다.

우리의 고향사람 최춘상씨,
있어야 할 곳이면 항상 있었던 사람, 때로는 졸업장이 없어서 더 좋은 직장을 포기하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었지만 그는 거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포기하는 아쉬움도 그는 안다고 했다. 미워하는 고통을 그는 잊지 못하고 있다. 수몰된 그 고향의 호수위에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빨간색 장미 한 다발을 던져 놓고 없어져 간 그 고향 뒷동산 지게 지고 땔나무 감 찾아 나섰던 그 친구들도 그리워 지금 불러 본다. (최춘상 연락처 H.P:011ㅡ318ㅡ0515)
/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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