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김정주씨
김 정 주 씨
진안읍 구룡리 예리마을 출신
구로구청 서예 강사
대한민국서가협회 회원
이수학회(理數學會) 회원
재경진안읍향우회 회원
재경진안군민회상조회 운영위원

필자가 연어의 모천회귀성(母川回歸性)을 경험하고자 그 귀로(歸路)를 따라서 어느 강줄기의 어느 가을을 수 없이 그렇게 헤매고 방황하며 터득한 진실은, 인간이 돈과 명예와 사랑을, 때로는 그것들에 관한 만족을 바라는 지극히 가엾은 동물이라면, 연어는 신성한 자신의 의무를 그 생(生)의 전부로 간직한 정말로는 우리 인간들이 본받아야 할 생물이라는 사실이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故鄕)을 떠나서 큰 바다(客地)로 나간다. 그리고 객지에서(큰 바다)에서 여러 물고기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사연들을 겪는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태어났던 강(고향)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특수한 습성에 의하여 천문항해를 하면서 자기가 탄생한 담수하천으로 찾아 올라가서 하천의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그 곳에 산란(産卵)하고, 그리고 일생을 그렇게 마감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그 험난하고 고된 여정의 일생을 그렇게 굳이 반복하는 것일가. 생각 하건대, 그것은 자신의 타고 난 운명적 본능에 대한 복종이고, 자신의 의무에 대한 숙명적 순종인 것이 어닌가 그렇게 생각이 든다. 수컷인 은빛연어가 눈 맑은 암컷연어가 낳은 알에 생명을 부여하고 조용히 죽어가는 그들의 삶이조금은 숙연할 만큼 아름답지 않은가.

상관없는 긴 이야기로 왜 여기까지 돌아 오는가.
연어만큼 그렇게 그런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으나 이즈음 고향의 한 친구를 만나면서 필자가 받았던 잔잔한 감동을 여기 적으려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조건 없는 향수에 동감했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면 항상 전쟁 직후 잉여인간의 표본 같은 쓸데없는 그런 생각으로 그의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어쩌고 하는 그의 노래를 듣고서야 아, 이이가 끼가 조금 있기는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던 친구였다.

김정주 씨.
고향을 떠나고 반세기.
가끔씩 그는 고향의 뒷동산이 그리고 독대(물고기를 잡는 그물기구) 들고 찾아가던 앞 냇가 개울물이, 그 속에서 뛰어 놀던 그 벗들이 그렇게 그리워 질수가 없었다. 그러한 그 고향을 위하여 무엇인가 할 일이 있을 것 만 같은데. 비록 지금 먹고 살기 힘들어도 고향에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을것 같은데. 떳떳한 진안의 향우로 바로 서는 방법을 찾는 그에게 기회의 영상이 머리에 뇌성처럼 그렇게 왔다. 그는 그의 40년 지기지우(知己之友)김광남씨(익산출신, 신도림역 대웅약국 약사.)를 생각한다. 여주, 이천지역에 대단위 오가피 농장을 갖고 있으면서 천안에 (주) 광남오가피를 경영하고 있었던 그 친구가 수출을 생각하면서 지역을 물색하고 있었던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는 무릎을 치고 일어선다. 잉여인간 적 그의 뇌리에 생기가 솟구치던 그런 순간 이였단다.
천안에서 진안으로‼
오가피 공장 유치를 위하여 광남씨의 설득에 나선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 하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던가?
오랜 두 친구가 의기투합한다. 내친 김에 오가피 농장도 진안에 갖기로 합의하고 진안군청에 공장설립에 관한 제반 절차도 마쳤다. 이렇게 이제 (주)대웅오가피는 연장제2공단에 그 고고(呱呱)의 성(聲)이 울렸고 그것은 김정주 씨의 기쁨에 날개를 달았고 이제부터 그의 고향사랑은 시작 될 것이다.

恭. 寬. 信. 敏. 惠
공손하고, 너그럽게, 믿음으로, 민첩하게 일을 다스리며 은혜롭게 세상일을 헤쳐 나가면 사람이 따르느니라. 그의 오래 간직한 좌우명이다.
41년생, 뱀띠 인생 예순에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다 하였다.
일찍이 빈농의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속깨나 썩였노라 눈물을 글썽인다. 방황도 깨나 했단다. 그 중에서도 시골의 콩쿨판을 휩쓸고 양은 냄비들도 타 날랐으나 홀어머니는 한 번도 칭찬하는 말이 아니였다. 22세에 뜻을 세우고 상경한다. 양은가게5년에 파산, 문래동에서 분식쎈타 1년, 문래동에서 중화요리(장미원)4년, 원효로에서 장미원(중화요리)몇년, 돈도 벌어봤고, 망하여 어려움도 받아보며 아내와는 이수학회 회장의 소개받고 연애로 발전시켜 40년을 같이 싸우며 노래하며 슬하에 4형제 두었으니 그게 인생 아니겠냔다. 참으로 허술한 그의 생활관이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정주씨,
그는 항상 소년적 배우지 못한 그것을 자신의 책임은 아니면서도 그것을 한으로 품고 살아간다. 소년시절 못 다 배운 서당을 찾아서 신길동의 서예학원에 입문 한 것이 오늘 서예20년의 김정주가 되었노라 그렇게 회고한다. 전북휘호대회 아홉 차례의 입선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서가협회가 주최한 예서, 초서, 행서, 한글 등, 각 부문의 입선 경력은 누가 뭐라 하드래도 그가 이 분야의 대가임을 우리는 믿는다. 그는 지금 구로구청의 서예 강사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정주씨.
한을 안고 살아 온 70평생이 이제 고향을 찾아서 그의 고향사랑의 뜻을 펴겠단다. 이중성 없는 그의 고향사랑이 의미를 흉중에 숨긴 그 음흉한 고향사랑의 가면보다 우리에게 주는 향기가 더 아름답지 아니한가. 계관(桂冠)의 거짓보다 무관(無冠)의 그것이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리라 하였다.
(김정주씨 H.P:016ㅡ219ㅡ8459)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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