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내옹기 이현배씨

▲ 자신의 가마에서 구워진 각종 옹기 앞에 선 이현배씨. 그의 미소는 꼭 옹기를 닮아 있었다.
손내옹기 이현배(46)씨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지간한 대하소설이라도 읽은 것처럼 옹골차게 긴 인생역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옹기를 굽는 옹기장이다. 91년 전남 벌교에서 옹기를 배워 지금은 진안군 백운면 손내(솥내)마을에 가마를 짓고 옹기를 구워내고 있다. 가마를 수리하고 있어 한 번의 만남이 미뤄진 후 다시 찾아갔지만 가마는 계속 수리중이었고 분주함도 여전했다. 마당보다 한참 높이 있는 집안에는 이런저런 장식용 옹기 소품이 놓여 있다.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이 그처럼 편안했던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다. 차를 내오겠다며 일어서는 뒷모습을 보며 내가 느낀 편안함은 그의 미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그의 미소는 봄날 장독대 위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 데워진 장독이 피워내던 구수한 장 냄새를 닮은 듯했다.
이현배씨가 직접 구운 투박한 옹기 잔에 차를 따르고 마주앉았다.

뿌리깊은 나무의 기사 하나
이현배씨의 고향은 장수군 장계다. 지금의 손내마을에 자리를 잡기까지 그의 이력은 참 다양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이력은 단절이 아니었다. 그에게 시간의 흐름은 필연의 연속성을 가지고 지금껏 흘러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준 소중한 잡지였다. 척박하고 가난했던 고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모님 때문에 방황하며 집을 떠났던 고등학교 시절 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잡지다.

그 당시 뿌리깊은 나무에는 ‘지나친 흡연은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라는 담뱃갑 경고문의 모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퍽~,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담뱃갑 경고문만큼이나 지금 자신의 생각이 모순이라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바로 알고 부정하라!’였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바로 알기 위해 근원인 흙을 알려 했는지도 모른다. 농대를 들어가려 했으나 대학에 떨어졌고 다음 선택한 곳이 호텔조리학과였다. 농산물의 최종단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입학한 서울의 경희대학교 호텔조리학과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생각했던 농산물의 최종단계라기보다는 서비스 측면이 더 강했다.

장독대의 오묘한 이치
학교를 휴학한 채 고향에 돌아와 엿장수를 했다. 손수레에 엿이나 빨랫비누를 싣고 다니는 엿장수는 사실 ‘고물장수’였다. 내려오면서 당시 폐간되었던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를 구해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리 밑에서 고물도 줍고 쉬는 사이사이 읽어내려간 뿌리깊은 나무는 문화감수성을 키워주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그즈음 ‘장독대’를 만난다. 고물 팔라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사립짝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보게 된 장독대는 참 묘했다.
“대접받는 자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소외받는 자리도 아니고, 대문에선 멀지만 부엌에선 가깝고, 그러면서도 양지발라야 하고.”
장독대의 위치는 그렇게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었다. 어지러운 사회환경과 맞물려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그 시기 ‘장독대’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로의 탈출(?)이 무산되고 포기할 뻔한 대학에 다시 복학한 후 실습을 나간 호텔에서 손재주를 인정받으며 그대로 취업을 하게 된다. 초콜릿을 만드는, 요즘 말로 쇼콜라티에가 되었다. 장식용 초콜릿과 먹기 위한 초콜릿을 만들면서 6년 세월을 보냈다.

“호텔에서도 한식부에 보내달라고 여러 번 시위했지만 번번이 좌절됐어요. 우리 농산물의 최종 단계가 한식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게 큰 바람도 아닌데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화도 나더라고요. 그래서 돈을 벌어보려고도 생각했는데. 호텔에서 일하면 할수록 돈은 의미 없어 보이더라고요. 제일 싼 게 돈이었어요.”

남도여행에 찾아간 옹기점
싸구려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호텔 로비에서 흙으로 빚어 청동으로 뜬 조각품을 보게 되었다. 그걸 보고 느낀 바 있어 화실에 다녔다. 고향에 돌아가 고물장사를 하면서 성과를 조소 작품으로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1년 정도 화실에 다니고 공부를 했는데 미대 시험에는 붙지 못했어요. 건강도 상당히 나빠졌고요. 그래 1년 정도 쉬면서 아는 분과 남도여행을 하게 되었죠.”
장승 깎는 지인과의 남도여행 마지막 날, 옹기점에 들렀다. 옹기점 주인이 옹기점을 찾은 이현배씨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왔어?”
“옹기 배우고 싶어서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해버리니 정말 옹기가 배워보고 싶었다. 그것도 절실하게. 아내 최봉희씨에게 상의하니 좋다고 했다. 정리할 것 정리해서 벌교에 있던 옹기점 박나섭씨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옹기를 배웠다. 초콜릿을 만들던 섬세한 손으로 흙을 빚어 우리의 전통옹기를 구워내는 이현배씨의 모습을 상상하니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이현배씨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예술가이면서 생산자’라 규정한다. 그 선택에 만족하고 있다.

발효식품의 전제 ‘옹기’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옹기는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겨울이 길었기 때문에 음식을 발효시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지요.”
옹기는 단순히 음식을 담는 그릇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온도 편차가 심하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의 조건은 발효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부패하지 않고 발효하기 위해서는 통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리식 발효는 특징이 있어요. 균을 따로 배양하지 않고 조건을 만들어서 자연의 균을 부르잖아요.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소통의 대상으로 여겼던 거죠.”
이처럼 이현배씨는 옹기의  근원적인 쓰임새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간편하게 현대식으로 화학유약을 바르고 낮은 온도에서 만들어도 예쁜 그릇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장을 제대로 발효시킬 수 없는 옹기는 건강한 그릇이라 할 수 없다. 발생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를 명확히 해 줄 때 제대로 된 건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굳이 일주일 넘게 전통가마에 장작으로 불을 지펴 고온에서 옹기를 구워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겁하게 농사꾼은 못되고 옹기장이가 됐지만 농산물을 담았을 때 그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 있으면 의미 있잖아요.”
옹기장이지만 농사를 짓고 싶었던 마음은 여전히 유효한가 보다. 긴 세월, 어디에 있든 흙과 흙에서 난 농산물에 대한 고려는 한결같이 관통하고 있었다.

옹기, 시대의 유물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예술적 가치를 무시한 채 전통옹기의 기능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옹기 그 자체로도 예술성이 충분히 있지만 그것에 작가만의 예술적 감각을 가미하며 인정받고 있다.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초대 판매전을 개최했고 인사동에도 역시 매장이 있다. 개인전만도 열서너 차례 개최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예술성과 기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실현해 내며 작품으로서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도 정통적인 부문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 장독뿐만 아니라 현대 생활에 필요한 주기나 다기, 조리용기 등 다양한 쓰임을 가진 그릇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장 담을 수 있는 장독을 안 만들 거면 그냥 예술만 해야죠. 경제성을 따져봐도 그렇고요. 사실, 옹기를 만드는 일은 개인작업이 아니에요. 마을작업이지요. 최소한 앞 일꾼 2명과 뒤 일꾼 1명, 막일꾼 2명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 스케일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옹기 굽는 마을을 복원하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공동체 문화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옹기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1960년대 지은 옹기점 건물이 그냥 허물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관여하다 아예 그곳에 자리 잡은 이현배씨. 흙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없어 지붕을 해 얹을 정도로 전통 옹기를 굽던 그곳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현배씨가 자리잡은 손내마을은 주변의 높은 산에서 나는 풍부한 땔감과 인근 마령평지의 흙, 풍부한 수량 등으로 과거부터 전통 옹기마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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