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봄, 진안고을 사람들 책바람이나 나볼까?"(19)

▲ 얼마나 고운 할머니이신가, 그 옆의 활짝 핀 접시꽃이 숨을 죽인 듯 하니-
나는 남자들을 무척 좋아 해요. 그렇지만 남자처럼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아요. 모처럼 여자로 태어났는데 왜 남자처럼 입으려는 거죠? 여자들이 긴치마를 입지 않게 된 것은 진짜 큰 실수라고 생각해요. 치맛자락 밑으로 하얀 발목이 살짝 보일 때, 남자들이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아세요? 무다리 같은 결점은 긴치마를 입으면 가릴 수 있는데 말이에요(타샤)

나도 남자들을 좋아해요. 그렇다보니 남자처럼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게 됐나봐요. 좋아 하는 것은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려서 그런가 봐요. 저도 긴 치마 입는 걸 한 때 참 좋아했지요. 그걸 좋아한 건 긴 치마에 살짝 보이는 하얀 발목에 남자들의 눈이 닿는 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발목과 엉덩이에 출렁거리며 스치는 긴 치마의 감각을 혼자 즐겼던 차이인거 같아요 (나)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릴 적에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 주는 거예요. 어릴 적 추억은 평생토록 잊혀지지않거든요. 나는 내 자식들에게 그런 추억거리들을 많이 심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우리아이들에게 물어보세요. 반드시 그렇다고 대답할 거예요(타샤)

저도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십대 때부터 가졌던 나의 꿈은 친구 같은 엄마가 되는 것 이었어요. 나도 내 자식들에게 그런 추억거리들을 많이 심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과 만나면 그런 추억거리들을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몰라요. (나)

이렇게 타샤할머니는 나와 마음을 맞추면서 나의 걱정거리들을 지워주기 시작했어요. 이젠 나도 타샤처럼 말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람은 늘 자연과 함께 해야 해요.
우리 모두는 자연의 일부분이니까요. 따라서 자연에 상처를 입히는 짓은 내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지요.

사진으로만 보는 당신이지만 어디서 만나든 금방 알아볼 자신이 있어요. 너무나 예쁜 할머니거든요. ‘큰 바위 얼굴’ 이야기 아시지요? 언제나 큰 바위를 바라보며 살아온 소년이 어느새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예요. 나도 언제나 당신을 마음속에 그리며 아니 당신의 얼굴을 붙여놓고 바라보며 살아야겠어요. 틀림없이 당신은 옛날엔 더 아름다우셨겠지만 지금의 주름진 얼굴이 내겐 더 소중해요. 왜냐하면 내 얼굴에도 주름이 늘어갈 것이니까요. 나도 당신처럼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우리부부는 어느 날 우리 나이가 이젠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이런 다짐을 했답니다.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자구요, 거기에다 예쁜 할머니가 되려는 꿈은 모처럼 여자로 태어난 나만 가질 수 있는 꿈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입말이 그대로 옮겨진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기뻣어요. 당신과 내가 닮은 점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었지요. 그런데 단 한 가지 내가 미칠 수 없는 게 있어요.

어차피 꽃을 심을 거라면 모든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알뿌리도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양을 주문해요. 어느 품종이든 몇 십개가 아니라 몇 백개 단위로 주문하지요 (타샤)
바로 이 점이예요. 그러나 실망하지 않겠어요. 당신처럼 많은 양의 꽃을 사다 심을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 심고 가꿀 거예요. 그러다보면 어느 날인가는 내 집도 당신의 집처럼 온통 꽃과 나무로 둘러싸여 멋진 그늘과 향기가 피어나는 집이 될 거예요.

당신의 일하는 예쁜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당신의 말을 곁들이는 것으로 당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 하는 일을 끝마칠 거예요.
참 당신이 들고 있는 그 낫, 우리가 서양낫이라 부르는 그 큰 낫 덕분에 당신의 허리는 곧추 서게 되었나 봐요.
당신은 그 낫을 들고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집 안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헛간에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 보면
지난날에 저질렀던 실수나 잘못들이
문득 떠오늘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난 그 기억을 떨치기 위해
수련꽃을 떠올린답니다.
수련 꽃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가라앉은
내 기분을 금세 밝게 띄워주지요.

예쁜 꽃보다 새끼 거위처럼 엉뚱한 것이
먼저 떠올라도 기분전환에는 효과가 있지요

마치 할머니와 포옹하는 것처럼 책을 가슴에 꼬옥 안으니 가슴에 그 무엇이 그득 차오르고 있었어요. 그 느낌을 놓치기 싫어 며칠 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 그 어떤 여객선보다도 다양한 장소로 여행을 시켜 주는 것은 책이예요”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나를 쳐다보셨어요. 입가에 떠 오른 잔잔한 미소가 얼마나 예쁘던지 당신처럼 예쁜 주름이라면 얼굴 가득 주름 생겨도 겁내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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