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8
주천면 용덕리(큰말, 섬뜸, 산제, 미적)

이번에 찾은 곳은 주천면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금산군 남이면과 경계를 두고 있는 용덕리(龍德里)이다. 큰말(대촌), 섬뜸(도촌), 산제, 미적동 네 개 자연마을로 이뤄진 이곳은 전형적인 산간지역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가운데 큰말과 섬뜸, 산제는 한 마을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까이 모여 있고, 미적만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용덕리는 용담군 이서면 지역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을 거치면서 일서면 신창리 일부를 병합해 주천면에 편입됐다.
인구는 네 개 자연마을을 합해 80여 가구에 2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인구 대부분은 노인이 차지하고 있으며, 인삼과 고추 등 밭작물을 재배하는 주민들이 많다.


▲ 나그네를 위해 커피를 내온 정옥순(왼쪽), 송복단, 성순애씨. 사진 바깥쪽으로 김점수, 황금순씨도 함께 있었는데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해 못찍었다. 비가 와서 농사일이 없는 날이면 이렇게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지낸다. 이들은 정말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이었다.
◆쌀이 나왔다는 바위
진안읍에서 정천면, 주천면 신양리를 거쳐 도착한 용덕리. 용덕리의 첫 자연마을은 미적(米積)이다.
마을이름에 쌀(米)이 들어간 만큼 마을이 쌀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거란 예상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미적에는 쌀과 관련한 전설이 담긴 ‘쌀바위’가 있어, 여기에서 마을이름이 유래했을 거란 짐작이 간다. 쌀바위는 미적마을에 접어들면서 오른쪽 건너편에 보이는 흰색을 띤 바위를 얘기한다.

[옛날 이 바위 뒤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맹수가 들끓어 인적이 끊어지자 절은 폐사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이 절의 주지는 절을 닫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석가모니가 나와 “내일 날이 새면 절 뒤 바위 아래에 가보라.”라고 말했다. 이튿날 주지는 그곳에 갔고, 바위 아래에는 하루 먹을 만큼의 쌀이 놓여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 쌀이 놓여 있었다. 손님이 오면 손님 수만큼 쌀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주지는 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후 ‘쌀이 나온다는 절’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지는 기뻤지만, 바위에 대한 궁금증이 날로 커졌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받는 것보다 한꺼번에 몇 섬씩 쌀을 받아놓고 싶었다. 그래서 주지는 밤에 몸을 숨기고 바위를 지켜보았다.

첫 시도는 주지가 깜빡 잠이 들어 실패했다. 다음날 주지는 다시 바위를 지켜보았다. 자정이 되자 바위가 움찔하더니 구멍이 뚫리며 쌀이 쏟아져 나왔다. 주지는 며칠을 지켜보다 ‘저 구멍만 닫히지 않도록 하면 쌀이 계속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대를 준비했다.
자정이 되고 구멍이 열리자 주지는 장대를 바위 구멍에 넣었다. 그런데 쌀은 나오지 않고 장대를 잡고 있던 주지는 그 구멍으로 딸려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 바위는 ‘쌀바위’라고 불렸고, 쌀이 나온 곳은 흰색이어서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진안군향토문화백과사전

이 쌀바위 앞으로는 여름철 물놀이하기에 좋은 곳이 있다. 물이 매우 맑은데다가 평평한 바위가 물밑에 깔려 있다. 한쪽에는 ‘쌀바위가든’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곳도 있어 민박도 가능하다.
그렇게 쌀바위 주변을 살펴보고 마을로 향했다.
먼저, 마을 입구에는 버스정류장이 마을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길로 접어들면 바로 많은 돌을 쌓아 만든 돌탑이 있다. 언뜬 보기에도 꽤 오래된 돌탑인 것을 알 수 있다.

▲ 미적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돌탑. 예전 홍수 때 무너졌을 때는 이 안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나왔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
◆아들 낳게 해주는 돌탑
마을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주 오래된 돌탑이다. 아주 윗대 할아버지들이 만들었다고만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돌탑이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 개인의 바람까지 이루어준다고 믿어 주민들은 매년 봄과 가을에 탑제를 올렸다.
하지만, 20명 남짓한 노인만 남은 최근에는 탑제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 제를 준비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주민들은 탑제를 지내지 못하면서 “마음이 좋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 돌탑에 공을 들이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작고한 전탑선 옹이 바로 돌탑에 공을 들여 태어난 인물이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아들을 낳고자 열심히 돌탑에 공을 들이던 부인이 있었는데, 그 덕에 그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그 부인과 남편은 돌탑 덕분에 아들을 낳았다고 해 이름을 ‘탑선’이라고 지었다. 전탑선 옹은 마을에서 집을 잘 짓기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단다.
이 밖에도 마을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꼭 돌탑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더는 젊은 부부가 없어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인심만큼은 최고
마을 안길을 따라 들어가면 조그만 경로당이 하나 나온다. 마을을 찾은 이날은 비가 와서 마을 주민 몇 명이 경로당에 모여 있었다.
송복단(83), 성순애(80), 김점수(71), 황금순(79), 정옥순(76)씨다. 마을 최고령인 김계월(89)씨는 이날 마을회관에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도 매우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단다.
“한 집에 한 명이나 두 명이 살고 있으니까 늘 이렇게 모여서 지내요. 워낙 사람이 적은데다가 모두 노인네들이라 혹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꼭 찾아봐요. 가족보다 더 가깝지.”

정과 인심이 넘치는 마을의 분위기를 주민들 표정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표정은 매우 여유있어 보였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가운데 성순애(80)씨가 돌탑에 얽힌 얘기를 풀어놓는다. 앞서 얘기한 전탑선 옹이 목격한 것이다.

“내가 19살 때 마을에 수해가 크게 났어요. 큰물에 집이고 뭐고 모두 쓸려 내려갔는데, 그때 돌탑도 무너졌어요. 돌탑이 무너진 곳에서 무언가가 물살을 헤치는 게 보이더래요. 잘 보니까 커다란 구렁이였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송복단(83)씨도 덧붙였다.
“위쪽에 용덕다리를 새로 놓으면서 옛날 다리를 부수는데 거기에서 큰 구렁이가 나왔대요. 그래서 공사를 멈추고 크게 제를 올렸어요.”

▲ 용덕리에서 금산군으로 넘어가는 광대정이고개 왼쪽으로 정자나무를 베어내고 세운 돌탑이 보인다.
주민들은 모두 그 구렁이가 마을을 지키는 영물이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돌탑이나 오래된 건축물에 손을 데지 않는 게 이 마을의 불문율이었다.
경로당에서 나와 마을 길로 나오자 멀리서 경운기를 끌고 오는 전원홍(62) 이장을 만났다.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농사는 때가 있기 때문에 바쁜 와중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전 이장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이야기를 했다.
“70세 미만 남자는 나하고 내 동생 전원철(60^새마을지도자) 두 명뿐이에요. 인삼농사하고 고추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어요.”

가장 젊은 두 형제는 자신의 농사일은 물론 마을 일까지 더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특히 마을에 고령 노인이 많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일일이 찾아다니며 일을 처리해야 해서 여간 바쁜 게 아니다. 그래도 전 이장은 불평 한 마디 없다. 가족만큼 가까운 이웃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와야 명맥이 유지되는데, 참 안타까워요. 뭐 우리 마을에서는 소득을 낼만한 게 마땅치 않으니까요.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데….”

▲ 섬뜸(도촌, 왼쪽)과 큰말(오른쪽)이 하천을 경계로 이웃해 있다. 왼쪽 섬뜸에 보이는 소나무는 용덕초등학교가 세워질 때 함께 심은 것이란다.
◆세 마을 옹기종기
미적에서 한참을 가면 상당히 많은 주택과 건물이 밀집한 곳이 나온다. 하천과 정자나무 등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큰말(대촌), 섬뜸(도촌), 산제 세 마을이다. 얼핏 보면 한 마을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깝다.
이곳에 접어들면 다리가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다니면서 본 다리만 10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세 마을을 가로지르며 난 하천 때문이다.

세 마을 가운데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섬뜸이다.
하천이 둥그렇게 돌아 흐르면서 큰말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섬을 보는 것 같다. 마을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먼저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폐교(옛 용덕초등학교)가 나온다. 소나무는 학교를 지을 때 함께 심었다고 하는데, 섬뜸의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단다. 그리고 폐교는 청소년 자연학습관으로 새단장을 해 문을 열었다.

섬뜸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바로 큰말이다. 마을 이름대로 용덕리에서 가장 집과 건물이 많다. 세 자연마을에서 유일한 가게도 이곳 큰말에 있다.
큰말에서 조금만 가면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 있는 산제가 보인다. 옛날에 산제당이 있었고, 마을 뒷산인 산제봉 이름을 따 ‘산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마을회관 맞은편 정자나무는 수령이 350년이 넘은 고목으로 높이가 19m, 둘레가 6.3m에 달하는 2등급 지정 군목이다.

세 마을이 가까이 모여 있는 만큼, 세 마을은 함께 산제와 기우제, 탑제 등을 지냈다.
산제는 정월 초사흗날과 시월초사흗날 산제마을 뒷산 산제당 큰소나무(나무는 벼락을 맞아 없어지고 대신 돌탑을 쌓았다.), 산제 정자나무, 섬뜸 소나무 세 곳에서 차례로 지냈다. 제물은 세 마을 이장이 번갈아가면서 돼지머리, 삼색과실, 떡 등을 준비했고 세 마을 가운데 정갈하고 깨끗한 집안의 어른을 제주로 삼았다. 산제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잔치를 여는데 풍물은 치지 않는다고 한다.

기우제는 가뭄이 들었을 때 저수지에서 지냈다. 피를 흘려야 좋다고 해 돼지 피를 뿌렸는데, 부녀자들은 물싸움을 하며 비를 기원했다.

▲ 군 보호수로 지정된 산제마을 정자나무. 마을회관 앞에 있는 이 나무는 높이가 무려 20m에 달하는 커다란 나무다.
◆큰말 정자나무 사라지고
용덕리에서 금산군 남이면 흑암리로 넘어가는 광대정이고개. 이곳 정상에는 돌탑이 서 있다.
본래 이곳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1992년 도로를 내면서 나무가 길을 내는데 방해가 된다며 싹둑 베어냈다. 문제는 나무를 베어낸 후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이어졌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큰말과 섬뜸, 산제 세 마을 이장을 비롯해 외지에 있는 마을출신 젊은이들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마을은 매우 어수선했는데, 마침 “탑을 세워야 한다.”라는 한 점쟁이의 말에 따라 돌탑 2기를 쌓았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을 벌였다. 이런 주민들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그 후 마을에서는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두 돌탑은 사라지고, 마을 사람들이 개울에서 깨끗한 돌을 가져다가 다시 돌탑을 쌓았다. 그리고 돌탑을 쌓으면서 주민들은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며 금 한 돈씩을 넣었다고 한다.

◆노인들 위한 편의 필요
돌탑을 살펴보고 광대정이고개를 내려오던 길에 한 사람을 만났다. 큰말에 살고 있는데(이름은 넣지 말아달라고 했다.) 비도 잠깐 멈추고 해서 산책 삼아 이곳까지 올라왔단다.
“여기 길이 내리막에 죽 뻗어 있어서 위험해요. 요즘엔 금산-전주 길이 새로 뚫려서 이 길로 다니는 차가 많거든요. 과속하지 못하게 카메라나 속도방지턱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실제 이 주민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광대정이고개를 오가는 자동차들은 내리막에서 속도를 내고 있었다.
“하나 건의할 게 있는데요. 여기 사람들은 금산장을 많이 이용하거든요. 그런데 예전에는 시내버스라서 장과 가까운 네거리에서 버스가 정차했는데, 지금은 직행버스라서 터미널에서만 정차해요. 그래서 짐을 한 보따리 들고 터미널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거든요. 주민 대부분이 노인인데, 행정구역이 다르더라도 협조해서 편의를 봐줬으면 좋겠어요.”

이곳 주민들은 수차례 군과 도에 이 문제를 건의했지만, 행정기관에서는 관할구역이 달라 도와줄 수 없다고 답변했단다. 게다가 금산군에서 택시기사들이 직행버스의 임의 정차를 감시하고 신고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고 한다.
터미널에서 장까지 거리가 택시를 탈 만한 거리도 안 되는데, 대부분이 노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몇 주간 지면이 부족해 ‘우리 마을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기획취재 때문에 몇 번 더 쉬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우리 고장, 우리 마을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지면에 담는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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