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황미애씨
황 미 애 씨
용담면 옥거리 운교마을 출신
(주) 황미애 겔러리 대표
한.일도예클럽 회원
재경용담면향우회 홍보위원
재경진안군민회 회원

물보라 피어나는 태고정 오솔 길/여운을 기다림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불러 볼 친구 없어도 바람소리 듣는다./ 쌓이는 낙엽에 태고정의 정적/나는 왜 잊지 못해 오늘처럼 사랑하나/나그네인양 차가운 고향아/ 은하도 흐르는 고요한 밤하늘/무지개 꿈속처럼 오늘은 포근한데/할미 산 거친 저 달 나를 숨긴다./
용담 출신 문학인시인의 이 시구(詩句)들이 그의 가슴에 와 닿는 것도 그의 연륜답지 않게 그의 감성에 다가오는 고향 용담으로 향하는 어쩌면 애절하다는 표현이 알 맞는 그의 향수의 절절한 실향의 추억을 그가 그의 가슴 전체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 이였다.

옛 성현은 이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다.(三十而立)라고 설파(說破)하였다지만 신세대 대열의 그의 향수는 남다른 의미의 향수에 관한 철학을 담고 있었다. 그는 용담 고향에 대한 애착을 말한다. 그는 실향민에 관한 애환을 이야기 한다. 그는 고향의 어릴 적 추억을 어른처럼 엮어 이야기 한다. 망향의 동산과 태고정의 추억에 관하여 또는 고향 앞 냇가의, 뒷동산의 그 추억들을 어른처럼 한숨 섞어 이야기 한다. 만경창파(萬頃滄波) 되어 넘실대는 용담호를 내려다보며 그의 고향에 대한 야무진 꿈의 설계도 잊지 않는다. 진안의, 용담의, 이 천혜의 공간에 세우고 싶은 테마랜드의 꿈도 이야기 한다. 박물관도, 미술관도, 그리고 연극무대가 있는 문화공간도, 그렇게 수많은 고향을 사랑하고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쳐 가면서 한번쯤 더 고향을 그리워하는 체험공간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그는 갖고 이루겠노라고 강조한다.

1969년, 용담면옥거리운교부락에서 육남매의 막내로 태어난다. 발랄하고 생기 있는 그의 언어거나 행동의 구비 구비에 숨겨져 있었던 그 그늘은, 그의 웃음 뒤에 여운처럼 있었던 그 한숨들은 어릴 적 조실부모(早失父母)한 부모님에 대한 그 그리움 이였다.

세 살 적 아버지를 잃는다. 용담중학교 삼학년에 다시 어머니의 임종을 보면서 그는 심한 인간 상실 증세를 배운다. 그것은 허탈 이였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기억 할 수 없는 멍한 그 그리움 이였다. 여러 형제들의 배려에 힘입어 전주의 중앙여고에 진학한다. 신은경아라는 기린여중하교 학생의 부모님의 배려를 그가 잊지 못해 하는 것은 당시 용담지서의 지서장으로 계시던 신용인씨 그 분이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그가 인간의 덕(人德)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자신이 갖고 쌓아 온 형설의 공도, 또는 인간성 형성의 그 걸음도 그 분의 그 그늘로 되돌림 되어 그림자처럼 그가 닮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그가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황미애 씨. 그가 그렇게 어릴 적의 그리움과 고독의 사춘기를 추억으로 아름답게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 , 그것은 신앙의 힘 이였다고 그는 술회한다. 전주에서 중앙여고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그는 그의 텅 비워 있었던 그의 가슴에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그가 연세대 물리학과(88학번)를 졸업하고 동시영어사 홍보부 실장으로 4년, (주)현원(MP3풀레이어)마켓팅 본부장으로 2년, (주)MPO 마켓팅본부 이사로 재직하면서 신세대의 지식인으로서의 컨버전스 물결에 무관 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개입된 개인적 경험의 기억이거나, 우리의 기억 속에 불쑥 자리 잡은 지식이거나, 컨버전스형 신인류가 되는 것은 오늘 날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그것은 필수이기 때문 이였을 것이다. 그는 (주)디지탈 M 컨버전스를 창업하고 그 대표에 취임한다.

전주중앙여중 시절 그는 교육청이 주최하는 사생대회에서 입상하는 예(藝)의 그 길에 끼를 보였음은 오늘 그가 도자기, 그림 같은 화랑문화의 마켓팅에 눈 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길이 너무나도 당연한 그의 길인 듯하다. 일찍이 그는 단국대 도예연구소 도예학과(1년)를 수료하고, 처음 도자기의 메니아로서 취미활동을 시작 한 것이 이제 본업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2002년 단웅회 주최 도예정기전, 2003년 단국대개교30주년 도예전, 2002년 단웅회소품전에 출품하는등의 활동으로 그 분야에 영역을 넓혀 왔으며, 이제는 도예예술의 애호가로서가 아닌 전문가로서의 그 길에 도전한다. 오는 5월 중순에는 인사동에 (주) 황미애겔러리를 문 열어 그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 중이다.

어느 날 그가 근무하는 겔러리에 불쑥 찾아 온 한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사랑하며 50년만 같이 살자.’
그의 남편 한동욱(37세 부산출신.)씨의 프로포즈 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했고 지금 다섯 살 된 딸 현영이가 있다. 그의 남편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는 자랑한다. 때문에 자신은 무척 행복한 여인이고 자신도 무척이나 그의 남편을 사랑한다고 얼굴을 붉힌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임을 그가 자랑하는 이유다.

얼마 전에 남편과 함께 감상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오래 그가 마음이 가는 것도 그 영화의 가족들에 대한 연민인 것을 그는 안다. 이 영화는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이야기이다. 평범한 가정의 아이와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 인생의 아를다움을 뜻하는 의미는 아버지의 은유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공포 속에서도 아들에게 아버지는 거짓말로 희망을 준다.

‘지금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다. 일등을 하면 상으로 탱크를 받는다.’ 아들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말을 믿는다. 독일군이 퇴각하기 직전에 아버지는 죽는다. 아버지의 숭고한 희생으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들은 엄마를 재회한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가족이 아닐가 생각이 된다. 역경 속에서도 사람의 힘으로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향하여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고향사람 황미애 씨.
그는 우리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고향을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거기는 인간의 요람이고, 거기는 정감의 산실이고, 비록 서럽고 외로운 추억의 비탈이 있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극복하고 다가가야 할 값이 있는 곳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 그는 용담호에 묻혀 간 그 옛집의 추억을 찾아서 그 자리에 베이지 색 장미 한 다발을 던져 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가물가물 잊혀져 가는 그 어머니의 모습이 실루엩으로 그에게 다가 온다.
황미애 H.P : 010ㅡ6488ㅡ1874 /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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