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면의 정치 1번지 … 원장마을
공무원과 교사 등 많이 살고, 교통 요충지

글 싣는 순서

   용담댐의 역사를 찾아서, 인터뷰…사진작가 이철수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진안읍 가막리 죽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상거ㆍ하거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운교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원장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송림마을

 

 

▲ 원장마을을 지킨 돌거북.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난을 당했다.
큰 장이 열린 ‘용담장’
삶의 숨결이 묻어나고, 정이 넘치는 곳 용담면 수천리 원장마을. 이 마을은 용담장이 열린 곳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운교마을(6월 1일자 261호 참조)이 용담의 소재지로 잘 알려졌다면, 원장마을은 재래시장과 함께 사람들이 더불어 살던 곳으로 더 잘 알려졌다.

용담장이 열리던 원장마을은 용담주민과 주천, 안천, 정천, 동향 주민이 이용했다. 이곳은 마포(삼베)를 비롯해 꿀, 송이버섯, 칠 등 농·특산물을 구매하기 위해 외지 장사꾼이 몰렸던 곳이다. 용담장의 풍경은 회상하는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게마다 생선과 호롱불, 그리고 필요한 석유 기름을 구입했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에도 인삼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던 시장에는 인삼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금산과 고산에서 찾아온 장꾼이 많았다. 시장에는 삭정이(살아 있는 나무에 붙어 있는 말라 죽은 가지)이와 장작, 갈퀴나무(갈퀴로 긁어모은 검불, 솔가지, 낙엽 등 땔나무) 등 땔나무를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이 재래시장은 서두와 같이 용담주민과 주천, 안천, 정천, 동향 주민이 이용했으며, 5일에 한 번씩 열렸다. 용담장은 1912년 2월 7일에 운교마을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날은 3일과 8일에 열렸다.
원장 숲거리에서 보이는 농협창고는 옛날에 연초수납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용담, 정천, 주천, 동향 지역의 연초 경작자들이 지게에 지고 온 담배 잎을 수매하는 데만도 한 달 이상이 걸릴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
고종(1895년) 32년에 용담군 군내면 원두리(원두리)와 장미룡리(장미룡리) 두 마을이 존재했던 지역이 일제의 부, 군 통합령에 따라 1914년 3월 1일에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원장마을이 되었다. 또 원장마을 앞에 흐르는 수성천을 따 수천동 또는 수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장마을이 수천리가 되면서 원장마을과 하거마을(본보 5월 18일(금) 259호 참조), 송림마을(본보 6월 15일(금) 263호 예정)이 이에 속했다.
원장이란 마을 이름은 1914년 마을이 통폐합 되면서 용담군 군내면 지역의 원장리와 장미룡리 두 마을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 원장마을이 된 것이다.

운교마을이 면사무소를 비롯해 학교 등 관용기관이 자리해 중요 요충지로 작용을 했지만, 공무원과 교사 등 많은 사람들은 원장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수몰되기 전에 마을이장으로 활동했던 이용구씨는 “용담면이 정치 1번지였다.”라면서 “공무원, 교사 등 원장마을에 전입신고를 하고 살았기 때문에 인구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 출처: 진안문화원 '용담지역문화 2'에서

원장마을 세대배치도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1. 김부길

2. 김갑용

3. 이정우

4. 변상희

5. 육형철

6. 김창호

7. 백병용

8. 박천우

9. 정해복

10. 김윤봉

11. 이봉순

12. 김영수

13. 이순옥

14. 고영옥

15. 박영수

16. 고병촌

17. 지태언

18. 김봉섭

19. 이옥희

20. 김재호

21. 김상철

22. 문상철

23. 고병옥

24. 이종섭

25. 김수생

26. 이종성

27. 손송운

28. 정종택

29. 방완수

30. 염재용

31. 박형근

32. 유영옥

33. 문동수

34. 김현준

35. 이근배

36. 원복란

37. 박해정

38. 고봉근

39. 김봉선

40. 이용구

41. 서태서

42. 한효정

43. 고만근

44. 서광서

45. 조태원

46. 추옥희

47. 한을성

48. 최태환

49. 권진수

50. 방호선

51. 이분임

52. 송종현

53. 권용복

54. 양창남

55. 김춘자

56. 박경래

57. 육상평

58. 김진창

59. 박영상

60. 왕숙재

61. 최옥순

62. 최기웅

63. 권용기

64. 최순일

65. 엄소쌍례

66. 최정환

67. 김종현

68. 박해준

69. 김영만

70. 이익순

71. 안재환

72. 이창옥

73. 최남용

74. 신용경

75. 박완식

76. 권상홍

77. 서재성

78. 서옥성

79. 송종문

80. 황용인

81. 신선욱

82. 고복동

83. 김옥희

84. 백종호

85. 문정환

86. 강순임

87. 이대희

88. 박금복

원장에 살았던 성(姓)씨
운교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용담 염씨는 원장마을에서 제일먼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담 염씨에 이어 제주 고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 외에 많은 성씨가 마을에서 살았는데 수몰되기 전까지 김씨, 이씨, 박씨, 고씨, 최씨, 권씨, 서씨, 문씨, 육씨, 백씨, 방씨, 한씨, 송씨, 신씨, 변씨, 정씨, 지씨, 손씨, 염씨, 유씨, 원씨, 조씨, 추씨, 왕씨, 양씨, 엄씨, 안씨, 황씨, 강씨 등이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삶이 묻어난 원장마을
원장마을에서 바라본 동쪽에는 아드기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재는 달기재라고도 불리었다. 이 재를 넘으면 옛날 달계역이 있던 터가 있다. 이 터를 지나면 원월계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원월계에서 부암, 성남을 지나 안천면과 동향면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운교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용담 염씨는 원장마을에서 제일먼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담 염씨에 이어 제주 고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 외에 많은 성씨가 마을에서 살았는데 수몰되기 전까지 김씨, 이씨, 박씨, 고씨, 최씨, 권씨, 서씨, 문씨, 육씨, 백씨, 방씨, 한씨, 송씨, 신씨, 변씨, 정씨, 지씨, 손씨, 염씨, 유씨, 원씨, 조씨, 추씨, 왕씨, 양씨, 엄씨, 안씨, 황씨, 강씨 등이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원장마을에서 바라본 동쪽에는 아드기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재는 달기재라고도 불리었다. 이 재를 넘으면 옛날 달계역이 있던 터가 있다. 이 터를 지나면 원월계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원월계에서 부암, 성남을 지나 안천면과 동향면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서쪽 방향은 태고정 고재를 넘어 신정, 원와룡, 영강마을에 이르고, 까막고개에서 주천과 정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또한 쇠독뻘을 지나 매봉산 기슭에 자리한 송림마을이 보였다고 한다.
원장마을 남쪽 앞산에는 남산이 보였다고 한다. 남산에는 옛날 절터가 있었고, 또 오리정 들을 지나면 용담교가 자리했다. 용담교를 지나 호암마을을 지나 고내미재를 넘으면 왼쪽에 정천면 자리하였고, 오른쪽에는 용담면 월계리와 송풍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용담향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중학교 뒷산은 추줄뫼라고 부르던 수원산이 자리하였다. 그 왼쪽 한젓골로 들어가면 송풍리 방화동으로 가던 옛날 길이 있었다고 한다.

숲거리에 얽힌 이야기
원장마을 숲거리 입구에는 높이 165m, 폭 4.5m. 두께 37cm의 돌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 돌을 원님 하마석이라고도 불렀다. 원장마을 입구에 도착한 원님이 말을 타고 읍내에 들어오기 위해 말에서 내린 곳이라고 한다.

또 숲거리 남쪽 제방 아래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나무 아래에는 겨울에 내린 눈이 녹을 정도로 물이 따뜻했다. 그 물을 원님이 마셨던 우물이라 해 원님 우물이라고 불렀다.

박영수씨와 이용구씨의 말에 의하면 “숲거리 앞 제방을 따라 하거 마을의 경계에 이르는 곳에는 돌 거북 한 마리가 쇠독뻘이를 향해 앉아있었다."라며 "마을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매봉산 줄기가 길게 뻗어 내린 기상이 세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이 바람났고, 이를 막기 위해 돌 거북을 쇠독뻘이를 향에 놓았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거북이가 바람나는 것을 막아 고을이 평안했다. 지금은 누군가 돌 거북을 가져가 거북이가 놓여 있던 자리에 없지만 조만간 가져다 놓을 것”이라고 한다.

▲ 이용구씨
인터뷰 … 원장마을 이용구 전 이장

용담 원장마을에서 10여년 이장으로 활동한 이용구씨. 그는 대전, 천안, 금산 등 많은 곳을 돌아 다녀보았다. 왜냐하면 원장마을이 수몰되면서 이주할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돌아 다닌 것이다. 하지만 정착할 곳이 마땅찮아 현재 살고 있는 용담면 월계리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 것 역시 신통치 않아보였다.

“오고가는 사람은 많은데 용담댐이 생기고 난 후에 볼거리가 없고 머물며 구경하는 사람이 없어, 휴게소 운영도 신통치 않아요. 가격이 맞으면 이곳도 팔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처럼 주변에 건물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있죠. 군에서 인구를 유입하려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인구 유출에 일등공신인 용담댐은 관광객마저도 외면을 하고 있다. 관광객이 머물 수 있는 볼거리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가격이 맞는다면 살고 있는 터전을 팔고 떠나려고 하고 있다.

“주민들이 정착할 곳을 결정한 후에 행정에서는 정주권개발 사업을 시작했죠.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말이 많았어요. 이주민들이 집단 이주를 권유했지만 행정에서는 받아주지 앉아죠. 그 후로 용담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7~80%는 충남과 금산으로 이주를 했어요. 충남에서는 이주민들을 유치하기 위해 이사 오는 사람들에게 20만원씩 주는 노력을 기울였어요. 제가 아는 사람도 받았다고 하니까요.”

용담댐으로 수몰되기 전 마을은 사람이 사는 맛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다르다. 수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수몰로 인한 고통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용담에 처음 전기 들여온 남편

▲ 계숙영씨
인터뷰 … 용담 옥거리 계숙영씨

용담에서 최초의 전기를 공급한 사람이 있었다. 호롱에 심지를 넣어 생활하던 시절에 마을사람들은 그를 선구자로 생각했다. 그 사람은 바로 최홍긍 옹이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86세가 된다. 하지만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최홍긍 옹의 부인 계숙영(82)씨는 아직도 용담면 옥거리에 살고 있다.

“저희 고향은 평안북도 이의주가 고향입니다. 신의주 아래에 있는 곳이죠. 한국전쟁 당시에 대전으로 피난 왔다가 부산으로 내려갔죠. 부산에서 생활했다가 다시 대전으로 와서 생활을 했어요. 남편은 대전에서 사업을 했어요. 사업을 하면서도 사냥을 좋아해 용담으로 사냥을 다녔었죠.”

사냥으로 인연을 맺은 용담은 최홍긍 옹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최홍긍 옹은 냇가의 보를 막아 수력발전을 일으켜 전기를 만들었다. 용담면의 최초의 전기는 최홍긍 옹의 손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용담에 살았던 주민들은 최홍긍 옹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용담요.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죠. 남편이 수력발전을 만들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수력발전을 만들어 잘 사용하던 전기는 비가 많이 내려 떠내려갔고, 그 후에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그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력이 들어와 그만두었죠.”

원장마을에 살았던 주민들은 아직도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손옥연(67)씨는 “제가 용담으로 시집와 호롱불을 사용해 바느질하고, 광목에 십자수를 놓았을 때였어요. 시집와 2년인가 3년 되던 해에 전기가 들어왔어요. 시집살이 할 때 스피커에서 뉴스와 노래를 들었으니까요.”
최초의 전기를 만든 최홍긍 옹을 마을사람들은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울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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