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치 벗삼아 선비들 시 읊던 태고정
후진 양성하던 야학당 송림마을 자랑

글 싣는 순서

   용담댐의 역사를 찾아서, 인터뷰…사진작가 이철수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진안읍 가막리 죽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상거ㆍ하거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운교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원장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송림마을

▲ 송림교를 놓은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다. 송림마을이 수몰되면서 현재 있는 용담면사무소에 공적비를 옮겨 놓았다.(좌측부터 김종암 이장, 방영선 면장 공적비)
녹색의 푸름을 간직한 소나무는 비바람과 눈보라의 역경 속에서 푸른 모습을 간직해 굳은 절개와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는 대나무, 매화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렸으며, 열 가지 십장생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장수를 뜻한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존재하면서 건축자재, 생활용품, 농기구, 땔감 등 다방면으로 이용되어왔다. 소나무처럼 푸른 마을이 물속에 잠겨 아쉬움을 더하고 있지만 그 마을은 실향민들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늘 푸른 송림(松林)마을
늘 푸른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던 마을. 이 마을은 용담면 수천리에 있었다. 마을 전체가 오래된 소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오래전부터 송림으로 불렸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소나무 송(松)과 수풀 림(林)을 써 송림마을로 불렸다. 박병국씨에 따르면 송림마을은 소나무가 많아 늘 푸른 곳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송림마을은 고종(1895년) 32년에 용담군 군내면 송림리 이었다. 그러나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군과 면이 합쳐져 수몰되기 전까지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송림이 되었다. 송림이 된 후 100여 년이 흐린 지금 마을은 사라졌다. 늘 푸른 송림마을이 물속에 잠겨 마을의 운명을 다한 것이다.

소나무와 학이 깃든 곳
용담의 자연의 경치를 벗 삼아 선비들이 시를 읊었던 곳이 바로 용담의 태고정이다. 선비들이 읊었던 시가 용담 8경(龍潭 八景)이 되었다. 하지만, 용담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면서 용담 8경 또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히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용강산에 걸린 가을 달을 보고 지은 용강추월(龍崗秋月) 이다. 두 번째는 태고정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느끼며 지은 태고청풍(太古淸風) 이다.
세 번째는 매봉산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지은 응봉낙조(鷹峰落照) 이고, 네 번째가 송림마을 소나무에 깃들은 학을 본떠 지은 송림수학(松林垂鶴) 이다.

다섯 번째는 소요대에 날아드는 기러기 떼를 보며 지은 소요낙안(逍遙落雁) 이며, 여섯 번째가 옥천암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지은 옥천모종(玉泉暮鐘) 이다. 일곱 번째는 서원에서 바라본 산봉우리와 맑은 물과 돌에 대한 삼천서원(三川書院) 이고, 여덟 번째가 성남마을 강물 위로 돌아오는 배를 보고 지은 성남귀법(城南歸帆) 이다.

이상 8경은 옛 조상이 자연과 함께 풍류를 즐기며, 풍경의 변화와 맑은 공기 그리고 소리를 듣고 섬세함을 표현한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용담 8경은 강용식(姜溶植)이 1976년 봄에 태고정 벽에 글을 써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태고정을 옮긴 현재 자리에는 용담 8경의 글귀는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출처: 진안문화원 '용담지역문화2'에서

송림마을 세대배치도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1. 김양님

2. 유금순

3. 배정열

4. 정혁균

5. 정상호

6. 최신희

7. 이분임

8. 김창규

9. 방수근

10. 김진홍

11. 문창현

12. 박상덕

13. 유상근

14. 김은채

15. 박병국

16. 박삼월

17. 조윤만

18. 박종음

19. 박윤환

20. 방방심

21. 이우용

22. 김인기

23. 김진성

마을주민 숙원사업 ‘송립교’
송림마을 주민의 숙원사업은 송림교를 놓는 것이었다. 송림교는 1955년에 완성되었지만 다리가 놓이기까지 주민들은 많은 애로사항이 많았다.
송립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돌과 나무를 놓아 임시방편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물이 불면 눈앞에 소재지를 두고도 건널 수가 없었다고 박병국씨는 말했다.

송림마을 주민의 숙원사업은 송림교를 놓는 것이었다. 송림교는 1955년에 완성되었지만 다리가 놓이기까지 주민들은 많은 애로사항이 많았다. 송립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돌과 나무를 놓아 임시방편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물이 불면 눈앞에 소재지를 두고도 건널 수가 없었다고 박병국씨는 말했다.

“물이 불면 송림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하지 못했죠. 그때는 마을 남쪽의 소요대재를 넘고, 서재들을 지나 전드기재와 용담교를 거쳐 소재지로 갔죠. 학생들도 용담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먼 걸음을 해야 했고요.”
불편을 느낀 마을 주민들은 마을 총회를 열어 기금조성을 위해 마을 공동작업과 조림사업에 나섰다. 공동작업과 조림사업을 통해 모인 기금으로 6개의 교각을 연차적으로 세우고, 긴 통나무를 놓았다. 그렇게 완성된 교각 위에 상판을 놓아 길이 58.8m와 폭 4.6m를 완성했다.

“그 시절에는 불편을 덜기 위해서 김종암 이장과 박상운 개발위원장 두 분이 마을을 이끌어 다리를 완성했죠. 재직하고 있던 방영선 면장의 공적을 기리는 비도 세웠고요. 가장공로가 큰 분은 김종암 이장님이었어요. 그분 역시 공적비를 세워드렸죠. 그렇게 해서 주민들이 마음 놓고 소재지에 다닐 수 있었고요.”
그러나 마을의 숙원사업으로 완성된 송림교 역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방영선 면장과 김종암 이장의 공적비는 새로 지어진 용담면사무소로 자리를 옮겼지만 왠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어색하기만 하다.

송림 주민과 소재지 주민 ‘물싸움’
오랫동안 계속해 비가 내리지 않고 메마른 날씨가 이어지면 어김없이 송림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내기 전에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행사는 송림교 아래에서 송림마을 주민과 소재지 주민이 물싸움을 하곤 했다.

“가뭄으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소재지 사람들과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송림교 아래에서 물싸움을 했어요. 소재지 사람들과 우리 마을 사람들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죠. 바가지로 물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등으로 물을 막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비디오로 찍어 놓았으면 볼만 했을 겁니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까지 그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지만, 수몰되면서 그 추억은 점점 잊힌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물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물싸움이 끝나면 사람들이 모여 송림마을 앞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어요. 먼저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나쁜 것을 보면 안 됐어요. 기우제를 지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야학을 통한 후진양성
송림마을의 자랑거리는 야학당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진사 박문혁은 1890년 서울에서 내려와 송림마을에 자리를 잡고 후진교육에 힘을 썼다고 한다. 그는 마을의 후진들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야학당을 지었다. 남쪽 방향으로 방을 만들고, 북쪽으로 마루를 놓아 계절에 관계없이 글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해 송림마을 주민들 모두는 글을 배울 수 있었고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이었다고 한다.

“야학당에는 글을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고 들었어요. 박 진사가 송림마을로 내려와 후진들을 위해 큰일을 한 거죠. 우리 마을 사람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이었죠.”
야학당은 배움의 기회를 준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이 곳 역시 주민들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송림마을에 살았던 성씨
송림마을에는 밀양 박씨와 경주 이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 그 이후로 밀양 박씨, 경주 이씨, 전주 이씨, 하동 정씨, 기계 유씨, 방씨, 배씨, 최씨, 문씨, 조씨 등이 살았다.
이 마을에는 인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매봉산 중턱에도 위치한 인물 바위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인물 바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송림마을에서는 방영선(1927년생) 군수, 유성근(1927년생)면장 그리고 김진무((1928년생)·방희선(1934년생)·박병국(1935년생) 농협 조합장, 정혁균(1925년생) 우체국장, 행정고시에 합격한 유병철(1963년생)씨, 사법고시에 합격한 김학기(1960년생)씨 등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박병국씨
인터뷰 … 용담농협 전 조합장 박병국씨

 
“우리 마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앞서가는 마을과 주민들 단합이 잘돼 퇴비증산으로 우수마을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우수마을로 선정되면서 진안군 지도자들이 우리 마을을 찾아와 주민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갈 정도로 앞서가는 마을이었죠.”

송림마을에서 살면서 용담 농협 조합장으로 활동한 박병국(74)씨의 이야기다. 박 씨는 현재 용담면 송풍리 새마을 마을에서 아내 유동금(74)씨와 살고 있다.
수몰 전 이야기를 풀어놓는 박 씨의 말에는 그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마을은 수몰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마을의 최고 공로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김종암 이장이었다. 박 씨가 기억하고 있는 김 이장은 마을을 위해 송림교를 놓은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우리 마을의 숙원사업인 송림교를 완성한 김종암 이장을 위해 공적비를 세워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아 마을 총회를 열고 기금을 마련했어요. 그렇게 김종암 이장의 공적비가 세워졌죠.”

박병국씨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가운데는 천렵을 빼놓을 수 없었다. 송림교 아래 냇물에서 마을 주민들과 조를 짜 고기를 잡는 즐거움도 삶의 일부분이었다고 한다. 냇물에는 물 반, 물고기 반으로 박 씨는 기억하고 있었다. 민물고기가 풍부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기분 좋죠. 술을 살 돈만 있으면 술안주는 냇가에서 잡으면 되었으니까요. 술안주를 구하기 위해 천렵을 했죠. 천렵에 앞서 준비할 것이 있는데 우선 조를 짜는 것이죠. 먼저 망태기를 매는 사람, 물고기를 쫓아다니는 사람, 족대를 잡는 사람, 보조원을 보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이 필요했죠. 송림마을은 물고기 잡는데 단합도 잘됐어요."

민물고기를 잡는 데에도 그들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 만큼 마을 주민들의 단합을 요하는 준비였던 것이다.
박병국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냇가에는 물 반, 물고기 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냇가에는 뱀장어, 메기 등 냇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족 자원이 풍부해 한 바구니 잡는 것은 시간문제 이었다고 한다.
“물고기는 정말 많았어요. 용담댐으로 수몰되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물고기를 원업이 먹었을 거예요. 맛 또한 일품이어죠.”

농촌의 많은 놀이 문화 가운데 하나였을 천렵은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삶이 묻어난 마을은 물속에 잠겼지만 그 가 간직한 기억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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