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참전용사 서 태 성 씨

전쟁.
그것은 지옥이었다.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속에서 전우는 쓰러졌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처절함이었다.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끔찍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악몽을 꾸고, 머릿속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처참했던 당시 모습이 뚜렷하다. 죽기 전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18일 보훈회관에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나온 참전용사 서태성(76ㆍ5급 국가유공자ㆍ진안읍 운산리 유산마을) 씨를 만났다. 그는 치열했던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지만 처참했던 전쟁의 기억은 도저히 지울 수 없다고 했다.

▲ 서태성씨
◆불타는 전장
서태성 씨가 징집된 것은 전쟁이 터지고 다음해인 1951년 4월이었다. 그전에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병을 앓고 있던 터라 미뤄진 것이다. 이때 서태성 씨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당시는 남과 북이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당시에 군에 입대하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죽기 전에는 전장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가족의 걱정은 컸다.

가족의 눈물을 뒤로하고 입대한 서태성 씨는 먼저 제주도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기간이 96일이었다. 훈련을 마친 뒤에는 부산에 있던 1사단으로 배치됐다. 소총수였던 그는 가장 위험하다는 척후병으로 작전에 참가하기 일쑤였다. 또 고지를 두고 뺏고 뺏기는 전투를 수없이 치렀다.

그 와중에도 서태성 씨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부모님을 다시 만나야했기 때문이다. 설날이면 부모님이 계실 고향을 향해 큰절을 올렸는데, 그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1사단에서 근무하던 서태성 씨는 서부전선,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근 전선으로 투입됐다. 당시 서태성 씨는 기관총 사수로 보직이 변경돼 돌격하는 아군을 뒤에서 받쳐주는 임무를 맡았다. 아군이 돌격하면 적군은 후방을 노리기 때문에 뒤를 얼마나 잘 지켜주는가가 작전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지탈환 작전이 많았는데, 한 개 사단이 작전에 투입돼 10여 명만 살아남는 광경도 수차례 목격했어요.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죠. 그 과정에서 서로 의지했던 많은 전우가 목숨을 잃었어요.”

서태성 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회상에 잠겼다. 방망이 수류탄을 아군에게 던지는 적군의 모습과 수류탄이 터져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전우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지금도 함께 싸웠던 전우들의 얼굴이 생생합니다. 한영선, 김종택….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며 꼭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약속했는데….”

▲ 전투중에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던 오른쪽 어깨의 모습
◆잊을 수 없는 노루고지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남과 북은 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점령해야 했기에 남과 북 모두 사활을 걸고 전투를 계속했다.

서태성 씨가 속했던 부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적군이 점령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고지를 향해 돌격을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포탄이 터진 겁니다. 순간 오른쪽 어깨를 몽둥이로 맞은 것 같았어요.”

당시의 전투는 노루고지라는 적 점령 고지를 탈환하는 작전이었다. 엄청난 포격과 함께 부대원들이 고지를 향해 돌격을 할 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어깨가 아팠다. 얼른 손을 가져다 댔다. 그랬더니 살점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푹 들어가 있었다. 가져다 댄 손은 흐르는 피에 젖었다. 서태성 씨는 가지고 있던 수건을 말아 부상 부위를 틀어막았다. 지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서태성 씨의 부상을 본 전우가 서씨를 끌고 고지 아래로 내려왔다.
“힘든 전투를 다 겪으면서도 운이 좋게 무사했는데, 전쟁 말미에 부상을 당했지 뭐예요.”

다친 서태성 씨는 야전병원을 거쳐 서울에 있던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리고 다시 경주로 후송된 서태성 씨는 이곳에서 군복무를 마감했다.

“군의관이 부산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랬으면 일찌감치 국가 유공자가 됐을 텐데, 저는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 전투중에 뼈가 부러졌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왼손목의 모습. 서태성씨는 지금도 궂은 날이면 이곳에 통증을 느낀다.
◆심각한 전쟁 후유증
군복무를 마친 뒤 3년간 서태성 씨는 매일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서태성 씨는 참혹한 전투 현장에 있었고, 죽어가는 전우들을 지켜봐야 했다. 꿈뿐만이 아니었다. 혼자 가만히 있으면 참혹했던 그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힘겨워했다.

게다가 포탄 파편을 맞은 어깨와 부러진 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왼쪽 손목은 수시로 아파 왔다. 아픔은 참을 수 있었지만, 아플 때마다 떠오르는 전쟁의 기억은 참기 어려웠다.

“결혼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딸을 제게 맡기려 하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전쟁 나가서 몸이 성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러다 지금의 부인과 중매로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됐어요.”

서태성 씨는 당시 진안면사무소에서 소사로 13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8남매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들이 셋 있는데, 이 아이들에게 늘 ‘남자는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어요. 국방이 튼튼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연예인, 재벌, 정치인들의 병역기피 사건은 서태성 씨를 더 아프게 한다. 그렇게 피를 흘려가며 지켜낸 조국인데,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서태성 씨에게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서태성 씨의 소원은 조국의 평화와 통일이다. 다시는 자신이 경험했던 그 참혹한 전쟁의 경험을 후세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전쟁이 없는 평화 속에서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산다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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