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완 식(용담댐 고객지원과장)

“종합병원으로 가-보세요.”딸아이가 상습적인 감기 환자라서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젊은 의사는 눈을 내려 깔고 짧은 문장을 느리게 말했다. 보통 10분 이상 걸리는 복부초음파 검사를 불과 몇 분만에 서둘러 마칠 때부터 행여나 불안했던 예감이 머릿속에서 휘익 소용돌이치는 느낌이었다.“무슨 병인데요?”“간 쪽인데요. 정밀검사 해 봐야죠.”“그래도…?”“종양이 보여요. 물혹일 수도 있고요.”99년 3월, 거절하기 어려운 보험부탁을 받아 동네 병원에서 보험가입용 신체검사를 하다가 덜컥 간암선고를 받았다. 3.5cm 짜리 종양 하나가 우측간 동맥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4월 8일 서울 S병원에서 간절제 수술을 받았다. 간암세포는 얄밉게도 영양의 공급이 좋은 동맥부근에 잘 발생하는데 예전에는 동맥을 다칠 수 없어 수술이 힘들었단다. 아직도 일부 지방병원에서는 수술이 어려운 부위라고 난색을 표하는데, 간의 부분이식이 가능한 현재의 의학수준에서 수술이 곤란한 부위가 있을 리 없다. (부분이식을 할려면 어차피 간동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접합해야 한다.) 마취실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고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40년 전 동생이었던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많은 날들을 그리움으로 보낸 분이다. 이동식 병원침상의 모서리를 끌어안듯이 맞잡은 주름많은 손등이 쉴새없이 떨고 있었다.고모님의 손을 잡아드리고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벽에는 푸른 초원과 밀밭이 어울린 들판위로, 이글대는 태양이 선명한 대형 그림 액자가 걸려있었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싸아게 아파왔다. 언제고 나는 내 발로 걸어 저런 태양 아래 초원 속으로 다시 나갈 수 있을까!그런 절실한 감상에 아랑곳없이 바퀴침상은 마취실로 들어선다. 문득 수술 대기 중에 서너 번이나 도망을 갔던 환자도 있었다며 입을 가리며 웃던 간호사의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아득히 멀어져 가는 의식의 끈을 가물가물 놓치고 말았다.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하얗게 밝은 어둠이었다. 어쩌면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느낌과도 같았다. 그런 무의식의 세상을 유영하듯이 떠돌면서 이리저리 기웃대며 다니고 있었다. 중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듯이 몸이 가벼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와아악-’하고 터지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여보-”“아버지-”흐느낌 속에 목메어 부르는 절규도 들렸다. 순간 나는 퍼뜩 자신이 죽은 걸로 착각하였다. 사실은 그때 옆 침상에 있었던 다른 환자가 운명하였단다. 병상을 지키던 가족들이 안타까운 절망으로 울부짖는 고통의 소리가 병실에 가득한데, 나는 자신이 죽어 내 가족들이 우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눈을 뜨고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 가야겠다고 무진 애를 태우고있었다.그 짧은 순간에 가슴속으로 바람처럼 쏴하고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아아∼ 이렇게 죽는 가보다. 이렇게 살고 마는 가보다.”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너무 바보 같았고 안타까웠다. 때로는 가슴저리며 괴로워하고, 혹은 미워하고 질시한 나날이 너무나 덧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던 고통과 자학, 선택의 기로에 섰던 갈등, 시간을 돌리고 싶은 안타까움, 사무치는 그리움, 자신조차 싫었던 젊은 날의 방황과 그 회의와 이상조차도, 이제는 한 조각 구름만도 못한 미망이 되어 어리석고 허망하였다.놀랍게도 당시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의 해답도 비교적 명쾌한 개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깝게도 그 해답은 의식이 돌아오면서 가물가물해지고 흘러간 시간만큼 세속에 물든 지금은 더욱 멀어져갔다. 누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이렇게 ‘깨닫고’ 가는 것일까!그리고 다음 순간 걷잡을 수도 없이, 뒤에 남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봇물처럼 가득하게 밀려왔다. 남겨진 재산도 없이 가장이 없는 삶을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야 될 가족들에 대한 애잔한 정과 사랑의 감정이 그리움과 범벅이 되어 목구멍을 턱턱 막듯이 치밀고 있었다.아내에게 좀 잘해줄걸,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어머님에게는 좀더 다정한 아들일걸,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가족들이 이제는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다시없는 그리움이었다.그러면서 차츰 의식을 찾아가는데, 다행히도 나는 허공으로 떠오르는 영혼이 아니라 중환자실 침상에 손가락 하나까지 심전도 측정기로 묶여있었다. 옆 침상에서 울부짖는 환자 가족들의 움직임과 통곡이 현실 아닌 꿈속 같이 흐릿한 영상으로 보였다. 다시없는 안도감 속에서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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