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필씨
이    정    필  씨

상전면갈현리신전부락 출신

맹호혜산진부대월남참전전우회 회장

성동공고총동창회 회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총기연구실 실장역임

재경상전면향우회 회장역임/고문

재경진안군민회 감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동산은 누에이며 마을의 터는 섶이라 하여 섶밭말, 즉 신전(薪田) 이라 하였다. 옛날 앞들의 가운데로 냇물이 가로질러 흘러서 뒷또랑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동쪽으로 고래실 논이 있는 농우실이 보이고, 상동선을 타고 동향으로 빠지며, 서쪽으로는 밤남정이들(栗亭坪)을 지나 30번 국도를 따라서 진안읍에 이른다. 남쪽으로는 주평초등학교와 원주평 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갈주교를 건너 큰 봇들을 거쳐 무주에 이어진다. 신전마을 뒷동산은 지리적으로는 누에이며 반달이라고도 하였고, 아름드리 육송이 울창하여 두루미(鶴)가 깃들던 곳이기도 하였다. 앞산인 금실곡은 금이 묻혀있는 금맥이 흐른다고 전하여 왔으며 서쪽 산 밑의 무진박골 샘에서 지내던 기우제의 기억도 새롭다.

여기가 이정필씨가 말하여 주는 그의 말을 빌린다면 꿈에도 찾아가는 수몰되기 이전의 그의 고향이다. 60년대 포연탄우(砲煙彈雨)의 월남전에 참여하여 그 어려운 생사(生死)의 어둠 속에서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고향을 잊지 못해서였을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간절하게 회고한다.

이정필씨는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상전초등학교와 진안중학교를 마친다.
흔히 우리가 만나보는 이정필씨는 유머와 위트로 주위를 즐겁게 하여주는 그러한 사람이다. 구김 없이 어울리는 그의 어디에서도 어떠한 앙금도 어떠한 그늘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시골사정으로 볼 때, 세상살이에 부담 없는 상당히 윤택한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러한 집안의 육 형제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난다.

해방 이후, 1940년대 이후를 살아온 우리는 당시의 시대상을 회고해 볼 필요를 항상 느끼면서 살아왔다. 해방의 감격은 잠깐,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기아와 궁핍의 고통, 이산과 심판, 그 자가당착의 그 세월 속에서, 살아 있는 이데올로기의 격랑은 더 심했다. 그 와중에서 그의 외가. 그의 어머니의 친정(親庭)이 갖고 있었던 부(富)의 형태는 지주계급으로 분류되는 부르주아의 눈총을 맞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외가의 몰락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의 곁에 왔다. 초등학교 1학년, 이정필씨는 어머니의 임종을 그렇게 맞는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이정필씨는 다시 아버지의 죽음을 본다. 이렇게 조실부모(早失父母)의 늪에서 큰아버지의 훈육과 맏형수의 부양으로 자라 오면서 그의 뇌리에 자리한 간절한 철학이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또는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주의의 눈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명랑해지려고 노력했고 우울하지도 외롭지도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다. 일찍 가슴에 그늘로 맺힌 정신적 공황으로 그가 지닌 숙명적인 슬픔을, 연민으로 또는 사랑으로 그렇게 바꾸는데 그의 이성(理性)을 다 하였다.

그렇게 이정필씨는 성동고등학교를 거쳐, 숭실대와 그 대학원의 화공과를 마치고, 현재 관계분야에 관한 박사과정을 이수중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총기연구실 실장으로 퇴임하기까지 33년간을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을 다 하였다고 그는 자신있게 회고한다. 아웅산 폭파사건, 칼 858사건, 강릉 북쪽잠수함 남하사건, 칼 007 여객기 소 영공 침범사건 등은 그가 재임중 관여했었던 기억에 남는 사건들임을 그는 회고한다.

업무와 관련된 많은 유혹도 있었지만 그가 그 모든 것들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와 가족들의 격려였다고 흐뭇해 한다. 경찰대학 부설 수사연구소, 경찰종합학교, 해양경찰학교, 국가정보원, 기무사 등 그가 출강했었던 모든 국가기관의 그의 후배들에게 지금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사건사고의 진실을 규명하고 범죄사실의 판정과 근거를 증명하는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을 그는 당부한다고 했다.

이정필씨의 나이 31세 적 스물두 살의 나이로 자기의 구혼을 뿌리치지 아니하고 시집와서 전셋집 20년을 불평 없이, 18번의 이삿짐을 옮기면서 살아온, 이년 전 마련한 25평형 연립주택에 입주하고 잠 못 이루어 하였던 그의 아내, 오늘도 부업인 아르바이트를 위하여 집을 나선 그 아내, 최효심(55세. 정읍출신)씨에게 자신이 국가로부터 받은 모든 훈·포장을 바친다고 했다.

우리의 고향 사람 이정필씨.
지금은 용담호에 묻혀버린 그 고향을, 그리고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부모님의 흔적을 찾아서 그는 가끔 거기를 헤매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 출렁이는 용담호의 물결 위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워 그렇게 불러본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여./
이정필씨 전화번호 : 019ㅡ513ㅡ7679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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