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 시인 임우성씨

▲ 집배원 임우성씨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천상 시인이다.
‘그대 없는 이 땅에 남아’는 시집이다. 한 손에 들어도 불편한 무게감이 전혀 들지 않는 딱 그만한 시집이다. 삐딱하게 앉아 후루룩 책장을 넘기다가 눈에 들어오는 시 한 편을 읽고 나면 곧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그리고 맨 앞장, 임우성 씨가 쓴 자서(自序)부터 차곡차곡 읽게 된다.

시인은 자서에서
“내 소망과 애정이 철저하게 묵살당하며, 내 능력 밖에서 가련하게 쓰러져 가는 한 여인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너무 외로워서, 너무 힘들어서 잠들지 못하고 울먹이며 끄적거렸던, 시적 성취와는 전혀 상관없는 병간 단문 모음집이라고 해야 옳을 것(생략).”
이라고 적고 있다.

진실이면서 겸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내의 병간 과정에서 기록한 것은 맞다. 그러나 시적 성취와 상관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람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문학으로서 ‘시’라면 그의 ‘그대 없는….’은 분명 시집이다. 그것도 훌륭한 시집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안타까움과 사랑, 격정에 휩싸여 있다. 그 감정이 시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함축이 너무 심하거나, 비유가 너무 비약적이지 않다. 가장 쉽고 적절한 언어로 표현해 시를 좇아가는 눈의 흐름에 감정의 흐름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시집 ‘그대 없는 이 땅에 남아’를 일독하고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아내에게 시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김현조 시인의 이 같은 표현이 임성우씨의 시집을 설명해 주는데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임우성 씨는 집배원이다.
임우성 시인은 벌써 25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 집배원이다. 언론에 의해 라벨이 붙고 그것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스타가 만들어지고, 다시 판매되는 요즘의 시류로 본다면, ‘우체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게다. 실상이 그렇고. 하지만, 세속적인 욕심을 가지고 그에게 라벨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경박하게 느껴진다. 그의 시집엔 그만큼의 고귀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웃 무주군의 한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후 번역 무협소설을 다듬는 일을 했다. 1980년 부근이다. 대만에서 발행한 무협소설을 가져다가 중국인 2세들이 거친 우리말로 초벌번역을 해 놓으면 문장을 부드럽게 다듬는 일이었다.

요즘에도 구할 수 있는 직업일지 모르겠다. 1년 남짓 그 일을 하고는 국민서관 도서 외판원을 한다. 돈도 돈이었지만 여행을 하고 싶기도 했다. 강원도가 영업지역이었다. 책을 팔기 위해 돌아다녔던 그때가 손꼽히는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탄광 지역에 대한 이해가 조금 있어요. 사북·정선 인근에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생각이 지금도 나요.”

외판원 일과 잠깐의 건설회사 일을 끝내고 정말 원했던 집배원이 된다. 전북지역 마지막 공채였던 것으로 임씨는 기억한다. 당시, 임씨가 할 수 있는 일 중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낭만적인 직업이라 생각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편지도 읽어 주고 급하면 비상약도 사다 주고. 마침 산골의 한 마을에 우편물 하나를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를 만나 순직한 한 집배원의 이야기도 한 몫 거들었다.

82년부터 시작해 한 3년 정도는 꿈꿔왔던 것처럼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했다. 편지를 대신 읽어주거나 쓰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공과금 심부름도 해 주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마을 길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모내기철이라도 되면 논둑에 앉아 먹는 밥이 매우 맛있어 배가 다섯 배 정도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때는 점심은 거의 주민들하고 먹었죠. 식당도 만나기 어려웠고요.”
딱 그가 꿈꾸었던 삶이었다.

◆진실한 감정은 그 자체로 시다
그렇게 집배원 일을 하면서 두 살 어린 아내 고 박순임씨를 만났다. 임씨가 서른 살이었을 때 전북 고창군에서다. 그곳에서 십여 년 결혼생활을 하다가 진안군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아내도 작은 가게를 하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했고 밭도 한 뙈기 샀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알콜달콩 살아가던 중 덜컥 아내가 병상에 누워버렸다. 인두암이었다.

그때부터 임씨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제가 천성이 게을러요. 새벽까지 책을 읽거나 다른 일 하다가 잠들면 아침에 아내가 힘들게 깨웠거든요. 근데 아내가 병원에 누워있으니 아침에 제가 늦잠 자면 세 아이까지 다 학교에 늦겠더라고요. 그래서 퇴근을 하면 일찍 자리에 누웠어요. 그러면 꼭 새벽에 깨요.”

새벽에 일어난 그는 다시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얼마나 외로울까. 그래서 그날 있었던 일이나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서 편지로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가 덜 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쓰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애틋함과 안타까움, 불안함, 슬픔, 아픔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이 그 자체로 시가 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편지로 보내는 것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그 글이 차곡차곡 모여 ‘그대 없는 이 땅에 남아.’라는 시집으로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 2000년 7월24일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리고 그 뒤 이야기를 조금 보태서.
그러나 그는 애초 시집을 낼 생각은 아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고 상을 치를 때 위로를 건넨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개별적인 만남의 자리에서 풀어내기엔 너무 버겁고 한계가 있는 이야기들. 당시 도서출판 ‘천지현황’의 대표였던 최규영씨에게 그런 뜻을 비췄고 최씨의 독려에 책이 나오게 됐다. 그것도 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임씨가 자서를 통해 극구 변명을 한 것도 그렇게 다 이유가 있었다.

◆자전거 대신 이륜차 타고
처음 1,000부를 인쇄해 도움을 준 사람들 모두에게 빠짐없이 보냈다. 때로는 감사함을 담은 편지도 동봉해서.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회신이 오기 시작했다. 추가주문이었다. 책값을 보내며 책을 더 보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결국, 다시 1,000부를 추가 인쇄하고 곧바로 500부를 다시 인쇄해 모두 2,500부가 세상에 뿌려져 사람들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켰다.
그렇게 아내를 떠나보낸 지 7년이다. 조금 있으면 기일이 돌아온다. 당시 4학년이었던 막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아버지가 끓여주는 미역국이 제일 맛있다는 막내다.
“지금도 그 사람 생각하면 참 고마워요. 나를 징그럽게 좋아했어요.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아쉽죠.”
7년의 세월이 흐른 이야기를 괜히 꺼낸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할까. 그의 시집을 보았고. 그 감성의 파장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지금도 여전하니.

진안우체국으로 그를 만나러 다시 갔다. 우체국 근무복을 입고 자신의 이륜차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다. 자전거를 타고 활짝 웃으며 편지를 배달하는 그의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아서다.
이륜차가 보급되면서 집배원의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는 그의 이야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나마 5년 정도만 더하면 집배원도 정년을 맞는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정년 후엔 평소 관심 있던 약용식물에 대한 공부도 더 해보고 컴퓨터도 체계적으로 배워 볼 생각이라고 한다.
따뜻한 편지 대신 날카로운 고지서가 우편물의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 시인 임우성의 따뜻한 감성이 함께 배어 온 세상에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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